
[스포츠서울 | 김현덕 기자] 한때 TV 속 ‘무속’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대체로 외진 시골이나 기묘한 괴담의 배경 속에서나 등장했다.
초가집 앞에서 북을 치며 굿을 하던 무당, 희번덕 뜬 눈으로 등장하던 귀신, 비 오는 날에만 울리던 북소리까지. 이는 오래도록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각인돼 온 이미지다.
하지만 2020년대에 들어선 K-드라마는 무속을 새롭게 풀어내고 있다. 낡은 굿당 대신 도심의 교실에서, 중년 무당 대신 교복 입은 소녀가 혼령과 마주한다. 그 결과 ‘무속’은 공포가 아닌 콘텐츠로, 장르의 변두리가 아닌 흥행의 정중앙으로 이동하고 있다.
◇요즘 뜨는 드라마에는 ‘무속’이 있다
tvN ‘견우와 선녀’는 무속 서사의 최전선에 서 있다. 고등학생 성아(조이현 분)는 낮에는 평범한 10대지만 밤이 되면 무당 ‘천지선녀’로 변신한다. 굿판을 벌이고 액운을 막는 진짜 무당이다.
그녀는 운명적으로 죽음을 앞둔 첫사랑 견우(추영우 분)를 살리기 위해 굿을 하고 귀신과 대면한다. 전통 무속의 핵심 요소인 ‘천도’가 주인공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무속이라는 소재는 성아의 캐릭터뿐 아니라 극의 구조 전체를 이끈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귀신의 사연을 풀어간다. 드라마 속 무속은 공포나 주술이 아닌 감정과 관계를 풀어내는 장치로 재해석된다.
이 드라마는 방송 2회 만에 케이블·종편 동시간대 1위를 기록했고, 3·4회에선 각각 5.2%, 4.2%(수도권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앞서 방영된 SBS ‘귀궁’도 무속 서사를 가장 대중적으로 풀어낸 작품 중 하나다. 무녀의 운명을 거부하던 여리(김지연 분)는 결국 첫사랑 윤갑(육성재 분)의 몸에 깃든 이무기 강철과 함께 왕가에 원한을 품은 ‘팔척귀’의 저주를 풀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무녀와의 로맨스를 중심에 놓고, 퇴마 판타지와 궁중 음모극을 뒤섞은 장르적 복합성이 흥행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했다.
첫 방송은 전국 시청률 9.2%로 출발했고, 최종회에서는 11%의 자체 최고 시청률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MBC ‘노무사 노무진’은 무속을 현실 문제와 결합시킨 이색 사례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 노무진(이학주 분)이 초월적 존재로부터 ‘노동자의 원한을 풀라’는 명을 받고, 갑자기 귀신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유령을 보는 능력을 갖게 된 그는 점차 스스로 무당처럼 이승과 저승의 중재자가 되어간다.
여기서 무속은 상징적 장치다. 억울하게 죽은 노동자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의 한을 달래며 사회적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은, 굿판을 대신해 펼쳐지는 현대식 천도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무속은 결국 ‘듣고 위로하는’ 도구로 기능하며, 이를 통해 노동 현실의 구조적 억압을 드러낸다.
‘노무사 노무진’ 9회 시청률은 전국 5.1%, 수도권 4.5%를 기록하며 동시간대 및 금토드라마 1위를 차지하며 인기를 끌었다.

◇왜 지금, 왜 무속인가
무속 콘텐츠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라 ‘한을 다루는 이야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 무속은 단순히 악령을 물리치는 개념이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떠나보내는 천도의 의미를 지닌다”며 “결국 그것은 상처 입은 존재를 구제하고 마음을 다독이는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에 감정적 서사에 최적화된 장치”라고 말했다.
특히 무속이 최근 다시 소환되는 배경에는 시대 불안에 반응하는 대중의 감정 구조가 자리한다. 계층 이동이 막힌 사회,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 속에서 MZ세대는 때때로 이성과 논리를 넘어선 방식으로부터 위안을 찾는다.
이때 무속은 운명을 바꾸는 주술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마음을 대신 들어주는 통로가 된다. 드라마 속 무당은 신비롭기보다 친근하고, 오컬트적 존재라기보다 현실의 아픔을 통역해주는 ‘감정의 조율자’로 그려진다.
정덕현 평론가는 “무속인이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것 자체가 현대적이고 발랄한 접근”이라며 “과거에는 공포 장르에 머물렀던 무속이 이제는 감성적인 드라마, 판타지, 청춘물과 결합하며 대중성과 공감대를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khd998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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