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단편 영화 ‘몸값’으로 충무로에 혜성 같이 등장한 이충현 감독은 손에 꼽는 신예 연출가로 꼽힌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끈 감독들의 후배 세대에서 뛰어난 연출 감각을 가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15분 가량의 원신 원테이크로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내용과 메시지, 연기까지도 완벽에 가까웠던 ‘몸값’에 이어 타임슬립을 소재로 전종서라는 뛰어난 배우를 발굴한 것도 이 감독이다.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에서는 전종서를 액션 배우로 탈바꿈한다.

오프닝시퀀스부터 숨 막히는 액션 장면으로 눈길을 끈 뒤 짙은 여성 서사를 만들어낸다. 여성이 한 조직을 일망타진한다는 스트레이트 한 이야기 속에서 연출가의 재능이 곳곳에서 빛난다. 마치 한 편의 발레 무대를 보는 듯 아스라한 조명과 분위기가 특히 돋보인다.

이충현 감독은 지난달 11일 서울 종로구 한 커피숍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뮤직비디오라고도 한다. 이해도 되는 게, 저는 마치 한 편의 발레공연처럼 보였으면 했다. 조직과 싸우는 장면이 아름다워 보이길 바랐다. 잔혹하지만 미적인 느낌을 넣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스트레이트로 다 때려잡는 영화, 부실한 서사 나도 아쉬워”

최근 여성 서사가 드라마와 영화계 모두 주요 콘텐츠로 부상했다. 이충현 감독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 서사를 꾸준히 해왔다. 단편 ‘몸값’도 사실상 여성이 중심이 된 작품이고, 넷플릭스 ‘콜’도 두 여성의 이야기로 영화를 시작해 매듭을 짓는다.

‘발레리나’는 엄청난 무력을 가진 경호원 출신 옥주(전종서 분)가 소중한 친구 민희(박유림 분)를 죽음으로 몰아간 최프로(김지훈 분)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아름답게 또는 잔혹하게 펼쳐낸 영화다. 여성이 한 조직을 완벽히 제압하는 작품이다. 마치 영화 ‘테이큰’을 연상케 한다.

“여동생이 둘이나 있어요. 예전부터 이상하게 제 작품의 주인공은 여성이었어요. 사실 여성 서사에 관심도 많아요. 앞으로도 몇 차례 더 여성 서사 작품을 만들 것 같기도 해요.”

‘발레리나’의 매력은 액션에 있다. 옥주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세팅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중반부 1:1 격투, 후반부 총격 장면까지, 다채로운 액션이 등장한다. 여주인공이 남자와 싸우는 액션 작품은 많이 나왔지만, 설득력을 갖는 건 다른 문제다. 어설픈 동작이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금방 몰입이 깨지기 때문이다. 전종서와 이충현 감독은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액션은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새롭게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액션 분량도 많았어서 걱정도 컸어요. 여성이 발레 공연을 하듯 싸웠으면 했어요. 발레가 은근히 아름답지만 치열한 게 있거든요. ‘발레리나’라는 제목 콘셉트에 맞게, 수많은 인원을 돌파해 나가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매력적인 액션이 있는 반면, 서사가 부실하다는 혹평도 나온다. 이야기가 일직선으로 달려 나간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근거나 개연성이 받쳐줘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는 미약하다. 아울러 최프로와 조사장(김무열 분), 명식(박형수 분)으로 안타고니스트가 분산된 것도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꼬집힌다.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에요. 빌런 캐릭터에는 여러 사건이 합쳐져 있어요. 많이 알려진 사건이다 보니까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스트레이트로 뻗어나가서 다 때려 부수는 모습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야기 전체에 아쉬워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빌런들은 서사를 안 주고 싶었어요. 사실상 지질한 놈들인데 스스로 멋있다고 여기는 존재여서요. 쾌감이 덜할 수 있는데 지질한 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담배 피우던 전종서 누아르 떠올라, 또 하라면 또 하고 싶어”

이충현 감독과 전종서는 지난 2021년 12월부터 공개 연애를 시작했다. 영화 ‘콜’ 공개가 지난 뒤다. 이후 두 사람은 ‘발레리나’에서도 함께 했다. 호사가들은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아 연애를 한 것 아니냐는 고까운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콜’하고 나서 종서씨와 한 작품을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러 부분에서 흥미가 있었어요. 비닐하우스에서 의자가 삐걱거리면서 담배 피우는 신이 있는데, 직감적으로 누아르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여기까지 이어진 것 아닌가 싶어요.”

영화감독과 배우가 연애한 사례는 있지만, 한 작품에서 다시 만난 경우는 흔치 않다. 아무래도 주위의 시선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조심스럽죠. 아무래도요. 그래도 이 역할을 할 배우는 전종서 말고는 없었던 것 같아요. 성격도 이런 식으로 뭔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폭풍 속으로 뛰어들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대체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연인이기도 하지만, 종서씨의 눈을 좋아해요. 액션도 액션이지만 감정을 담고 있는 얼굴이 좋아요. 배우가 가진 눈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갑작스럽게 “혹시 연애를 인정한 건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다소 큰 웃음이 나왔다.

“후회한 적은 없어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서 답을 안 했던 거지 굳이 공개하지 말자는생각은 없었어요. 서로 사귀는 걸 알리는 거에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종서씨가 무서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굉장히 순수한 사람이에요. 순수하면서도 모든 걸 쏟아붓는 에너지가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옥주가 큰 줄기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가운데 그 원인이 되는 존재가 민희다. 신예 박유림이 이 역할을 맡았다. 무시무시한 옥주와 반면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숨통이 없었던 옥주에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던 민희의 죽음이 옥주를 폭주하게 만든다.

“민희 캐릭터를 누구로 하느냐 고민이 가장 많았죠. 우연히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유림씨가 가진 본연의 이미지가 깨끗하고 좋더라고요. 저런 인물이 영화 안에서 고통받으면 자연스레 분노가 날 것 같았어요. 애초에 퀴어는 아니었어요. 옥주는 사랑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민희는 우정에 가깝죠. 관객이 해석하기 나름일 것 같아요.”

국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30대 감독이다. 서사적인 면에서 다소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연출적 재능에 비교해서다. 그가 그려내는 이야기가 수준 이하라는 개념은 아니다. 여전히 기대주고, 앞으로 영화계를 이끌 주역이다. 게다가 훤칠한 키에 배우 못지 않게 상당히 잘생긴 외모 역시 그가 화제를 모으는 이유다.

“제게 기대를 많이 해주시는 것 같긴 해요. 부담이 크진 않았는데 작품을 만들수록 부담이 생기는 것 같아요. 기대에 충족할만한 작품을 내는 게 제 몫이겠죠. 잘하고 싶어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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