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하나. 출처 | MBC 방송 캡처
[스포츠서울] '설마'를 '진짜'로 만들어버리는 힘. 어쩌면 임성한의 힘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임성한의 복귀작 '압구정 백야'는 첫 시작부터 비구니 차림을 한 여주인공이 클럽에서 옷을 벗어던지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로 '임성한답다'는 말이 나오는 장면이다. 지난 10년간 임성한은 '인어아가씨', '하늘이시여', '아현동 마님', '신기생뎐', '오로라 공주' 등의 작품으로 '막장'이라 불리는 그 중심에 서왔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이런 식의 '막장'을 썼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초기 단막극들은 뛰어난 필력과 대사를 통한 등장인물의 섬세한 감정 묘사 등으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임성한은 언제부터, 이렇게 누구보다도 자극적이고 종교적으로 '막장'을 쓰게 된 걸까?

임성한. 출처 | 스포츠서울DB
◇ "야. 이 웬수야. 좋은 데루 가거라"
임성한의 초기 단막극들에 대한 평들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1990년 KBS 드라마게임 '미로에 서서'로 데뷔한 임성한은 1997년 MBC 베스트극장 '웬수'를 시작으로 '두 여인', '솔로몬 도둑' 등의 단막극으로 작품성과 함께 남다른 감정 묘사를 인정받은 바 있다. 특히 '웬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기가 막히게 묘사해 눈길을 끌었다. '웬수'에서 며느리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어린 아들을 키우며 시어머니를 봉양한다. 그러다가 '아들을 절간으로 들여보내야 산다' 는 탁발승의 말을 듣고 아들을 절에 보내버리고, 그 때문에 시어머니와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버린다. 시어머니는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기에 내 아들 잡아먹고 부족해서 내 새끼. 어린 내 새끼를"이라며 며느리에게 성을 낸다. 이후 며느리는 긴 세월 시어머니의 모진 박대에도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지만 어느 날, 풍에 걸려 쓰러지고 만다. 며느리를 미워하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병으로 쓰러진 뒤 며느리의 수발을 들고, 풍을 앓던 며느리는 치매까지 걸려 시어머니를 '웬수'라고 부르며 지금껏 쌓아왔던 한을 풀어낸다. 그러다가 기어코는 먼저 세상에 떠버려 시어머니는 "너 웬수라고 했지? 웬수 같은 너하군 사십년을 살았어, 야. 이 웬수야. 좋은 데루 가거라"라는 말을 남긴다. 두 사람의 관계가 해소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뭉클한 감동마저 느껴지는 이 부분은 사실 최근 집필된 임성한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임성한이 처음부터 무조건 '막장'을 썼던 작가는 아니라는 소리다.

왼쪽부터 정보석, 김지수, 윤해영, 허준호. 사진 | MBC 제공
◇ '보고 또 보고', '늘리고 또 늘리고'?
일일 연속극으로는 최초로 57.3%라는 어마어마한 시청률을 냈다. 바로 1998년 방송된 임성한의 첫 일일극 '보고 또 보고'다. 겹사돈이라는 흔치않은 소재와 이를 풀어낸 생생한 캐릭터들은 '보고 또 보고'만의 장점으로 꼽힌다. 특히 어머니의 편애를 받고 자란 어리광쟁이 언니 금주(윤해영)와 언니를 편애하는 어머니 밑에서 꿈을 접었지만 야무지게 성장한 둘째 은주(김지수)의 극단적 대비는 시청자들에게 충격과 함께 신선한 재미를 선사했다. 그러나 무리한 연장으로 '늘리고 또 늘리고'라는 별명이 생기며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장서희. 출처 | MBC 방송 캡처
◇ 막장의 시작, '인어아가씨'
2002년 6월 첫 방송된 '인어아가씨'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간 아버지 때문에 충격으로 장님이 된 어머니와 동생을 잃은 여주인공 아리영(장서희)이 복수심으로 배다른 동생의 애인을 뺏는다는 내용이다. 극단적인 상황 설정과 폭발적인 갈등 묘사 등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나, 무려 6개월이라는 긴 연장 방송으로 고부 갈등을 아우르는 가정 드라마, 시트콤, '납량 특집' 풍에 결말까지 장르를 알 수 없는 막장으로 치달으며 논란이 된 바 있다. 이에 드라마 작가로는 최초로 안티 카페가 생기기도 했으며 수많은 안티 팬들로부터 5만 여건에 달하는 '절필 촉구'를 받기도 했다.

왼쪽부터 이주현, 이다해, 김성민. 사진 | MBC 제공
◇ '무속 소재' 전면으로 드러난 '왕꽃 선녀님'
이제는 익숙한 임성한의 무속 소재가 처음으로 전면에 드러난 작품이다. '왕꽃 선녀님'은 당시 ‘신내림’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입양아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 눈길을 끌었으며 여주인공 초원(이다해)의 실제 같은 내림굿 장면으로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러나 입양아를 '개구멍받이'로 묘사해 큰 논란을 낳았고 이 때문에 임성한은 입양협회의 항의와 시위로 드라마에서 중도 하차해야 했다.

이숙. 출처 | SBS 방송 캡처
◇ 친딸을 며느리로 맞은 '하늘이시여'…웃다가 죽는 악역에 '황당'
방송 초반부터 딸을 버린 엄마가 딸을 그리워해 며느리로 맞는다는 파격적인 소재로 논란을 낳은 '하늘이시여'는 분장사, 치위생사 등 특정 직업 비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또한 주인공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악역 캐릭터 소피아(이숙)가 코미디프로그램 '웃찾사'를 보며 웃다가 죽어버리는 황당한 장면으로 시청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 속에서도 방송 중반부터 종영까지 꾸준히 시청률 1위를 유지해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별칭을 얻었다.

임혁. 출처 | SBS 방송 캡처
◇ '눈에서 레이저가?'…현대판 기생 '신기생뎐'
'임성한'을 논할 때 어김없이 따라붙는 문제의 '레이저' 장면이 등장한 작품이다. 2011년 현대판 기생의 삶과 이들을 둘러싼 사랑 이야기를 다룬 '신기생뎐'은 빈번한 귀신의 등장으로 시청자들을 껄끄럽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초반에는 복잡한 출생의 비밀로 논란이 일었으나 종영에 가까워지며 할머니 귀신, 장군 귀신에 이어 동자 귀신까지 등장해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귀신에 빙의된 아수라(임혁)의 눈에서 푸른 레이저가 나오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가장 당혹스러운 CG장면으로 꼽힌다.

위쪽 임예진, 아래쪽 서하준. 출처 | MBC 방송 캡처
◇ "암세포도 생명인데…" 등장인물 줄줄이 죽은 '오로라공주'
2013년 방송된 '오로라공주'는 대기업 일가 고명딸 오로라가 누나 셋과 함께 사는 완벽하지만 까칠한 소설가 황마마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로 불륜,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묘사, 유체이탈, '암세포 발언' 등으로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임성한의 데스노트'라고 불렸던 뜬금없는 등장인물들의 죽음으로, 이 작품 하나에서만 개를 비롯해 총 13명의 출연진들이 줄줄이 죽음 및 강제 이민을 당하며 하차를 해야만 했다. 이밖에도 극중 암에 걸린 설희(서하준)의 "암 세포도 생명인데 내가 죽이려고 하면 암 세포들도 느낄 것 같다. 이유가 있어서 생겼을 텐데" 등의 발언은 방송 후 암 투병 환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성공적이었던 첫 시청률과는 달리 최근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압구정 백야'의 시청률로 "임성한식 막장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실제로 더 이상 자극적인 설정과 논란이 되는 대사들로 승부를 볼 수는 있는 시대는 지났다. 초창기 그의 드라마에는 분명 '자극'을 넘어서는 '재미'가 있었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신선함이 있었다. 막장드라마가 하나의 일반적인 장르로 자리 잡고 있는 시대에, 임성한도 이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
황긍지 인턴기자 prid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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