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태형기자]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에 대한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

3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는 지난 2007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한국인 유학생 조승희가 벌인 총기 난사 사건이 다뤄졌다.

범인 조승희는 노리스 홀 출입구를 쇠사슬로 봉쇄한 뒤 강의실 곳곳을 돌아다니며 9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32명의 학생과 교수를 무참히 살해했다. 부상자는 29명, 사용된 총탄은 174발이었다. 조승희는 범행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승희는 8살이던 199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조승희는 학교 내에서도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가족에게조차 학교 생활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선택적 함구증’이라고 했다. 특정 상황에 따라 말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조승희는 중·고등학교 시절 괴롭힘을 당했다. 발음도 어눌하고 목소리도 이상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딘딘은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대답하기 어려운 게 나는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유학 시절 ‘너 왜 이렇게 눈이 작아’라고 하면 ‘너는 코가 엄청 크잖아’ 이런 식으로 대처하며 이겨냈다. 그러다 보니까 하는 말에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 여기서 허우적거리는 순간 끝이라고 생각한다. 이겨내는 방법을 못 찾으면 더 심해지는 것 같다”라고 털어놨다.

사건이 일어난 후 주변 학생들은 “동양인이 범인이라고 했을 때 그 학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았다”라고 증언했다.

조승희는 수업 중에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강의실을 나가버리는 학생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학생과 교수들은 그의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몹시 끔찍하고 폭력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조승희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전 학과장 루신다 로이 교수였다.

루신다 로이 교수는 “그가 매우 외로워 보여서 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그가 달라지길 바랐고 가족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렸다”라고 밝혔다.

먼저 조승희에게 손을 내민 학우들도 있었다. 그들은 집으로 조승희를 초대했지만, 조승희는 몇 차례 참석 후 발길을 끊었다고 밝혔다.

조승희는 범행 당일 오전 9시, 기숙사에서 2명을 살해한 후 노리스 홀로 가기 전에 며칠에 걸쳐 직접 찍은 사진과 영상을 미국의 방송국으로 보냈다. 범행 전 동선까지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음이 밝혀졌다.

조승희가 범행 전에 쓴 선언문에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 등을 표현한 내용이 담겼다. 조승희는 “축하한다. 너는 내 삶을 소멸시키는데 성공했다. 너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 내 형제자매, 자식들 같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죽을 거다. 너희는 결코 우리가 어디서 공격할지, 너희를 어떻게 죽일지도 모를 거다. 너희는 항상 두려움 속에 살아갈 거다. 내 인생을 파괴해 버리고 나니 행복한가. 이제 행복한가”라고 적었다.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오윤성 교수는 “결정적인 트리거는 주위로부터의 거부라고 본다. 조승희는 그 책임을 외부로 돌린 것”이라며 “‘이건 나의 잘못이 아니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그것이 자꾸 쌓이면 분노 게이지가 점차 올라가게 되고, 세상을 향한 증오, 분노, 공격성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라고 분석했다.

조승희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가족들은 조승희가 그랬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조승희의 누나는 가족을 대표해 사죄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저희 가족은 희망도 없고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방향을 잃었다. 승희는 제가 함께 자라고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저는 승희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제 동생의 말할 수 없는 행동에 저희 가족은 큰 유감을 느낀다”라고 남겼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생존자들은 총기 규제 캠페인을 펼치고, 폭력 예방 재단을 운영하는 등 아픔을 이겨내고 있다. 유가족도 총기 사고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tha93@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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