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정하은기자] “100세까지 노래하고 싶다 하시더니…이렇게 황망하게 가셨나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 고(故) 현미(본명 김명선)가 가족과 동료 연예인들의 오열 속에 세상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의 마지막 길이었음을 알았는지 하늘도 울었다.

11일 오전 9시 40분경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현미의 영결식이 엄수됐다. 이날 영결식 사회는 코미디언 이용식이 맡았고, 대한가수협회장 이자연이 조사를 낭독했다. 가수 박상민과 알리는 추도사를 읊으며 고인을 애도했다.

이날 영결식에는 한지일, 서수남, 정훈희, 이자연, 노사연, 노사봉, 양지원, 김수찬, 남일해, 박상민, 이용식, 알리, 한상진 등 약 50여명의 동료와 후배 가수들이 참석했다.

현미는 앞서 지난 4일 오전 9시 37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에 쓰러진 상태로 팬클럽 회장 김모씨에게 발견됐다. 이후 김씨의 신고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향년 85세였다.

이날 영결식은 대한가수협회장 이자연의 조사로 시작했다. 이자연은 “수십년 동안 노래처럼 떠날 때는 말없이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떠나가셨다. 선배님의 호탕한 그 웃음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운을 뗐다.

이어 “언제나 선배님이 계시는 자리에는 웃음꽃이 피어나고 선배님의 무대는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파워풀한 가창력과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현역이라는 자리를 굳건히 지켜내셨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현미는 대한가수협회와 오는 13일 공연을 앞두고 하늘의 별이 됐다. 이자연은 “멋진 무대 설 수 있다고 그렇게 기뻐하시더니 며칠 앞두고 이렇게 황망하게 가시다니”라며 애통함을 전했다.

이어 “늘 100세까지 노래하고 싶다고, 70주년 기념 콘서트도 하고 싶다고, 선배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멋진 계획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애도했다.

이자연은 “한 세상 뜨겁게 사랑하고 신나게 살라던 선배님.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먼 여행길을 떠나셨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따뜻한 사랑과 호탕한 웃음 지울 수 없다”며 “그런 선배님 모습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하늘나라에서도 선배님 노래 수많은 별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큰 별이 되어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시고 남은 열정과 못다한 꿈은 하늘나라에서 꼭 이루시길 바란다”고 추모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용식은 “현미 선배님의 데뷔 70주년 콘서트는 하늘나라에서 송해 선생님이 사회를 보는 천국 콘서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후배가수 박상민이 추도사를 읽어나갔다. 박상민은 “몇 년 전에 미국에서 공연할 때 아무 조건 없이 게스트로도 서주셨는데 며칠 전에 슬픈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여든이 가까운 연세에도 최근까지 활동하시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박상민은 고인이 가요계에 남긴 업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상민은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압도적인 성량과 예술성, 주옥같은 히트곡들로 진짜 후배들이 감히 따라할 수 없는 정도로 스타셨다”며 늘 크고 넓은 마음으로 후배들을 보듬던 현미를 기억했다.

알리는 “KBS2‘불후의 명곡’ 이봉조 선생님 편에서 선배님을 만났다. 당시 제 노래를 듣고 눈물 짓던 선배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힘찬 목소리가 날 닮았네’라고 하셨다”며 현미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알리는 “깊이 있는 목소리, 온몸을 뒤덮는 울림, 저 역시 가수로서 선배님의 열정을 닮고 싶다”며 “후배로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선배님의 빈자리를 조금이나 메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을 덧붙였다.

조가로는 현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떠날 때는 말없이’가 선곡됐다. 이 곡은 1964년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동명 영화 주제가로 쓰였다. 이어 유가족들을 비롯해 생전 고인과 인연을 맺은 동료들이 영정 앞에 헌화하며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 이후 곧 바로 발인이 거행됐다. 10시경 관이 운구 차량으로 옮겨졌다. 영결식 내내 흐리던 하늘은 운구가 시작되자 현미의 마지막 길을 함께 슬퍼하듯 비가 내렸다.

고인의 조카인 배우 한상진이 영정을 들고 운구행렬을 이끌었다. 가수 서수남, 박상민, 김수찬, 양지원 등이 운구하며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특히 조카 한상진과 노사연은 발인 내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노사연 언니 노사봉도 오열하며 동료들의 부축을 받았다.

차량이 장례식장을 떠난 뒤에도 수많은 동료들은 한참 동안 멍하니 차량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운구 차량이 떠나자 거짓말처럼 비도 그쳤다.

고인의 장례는 지난 7일부터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됐다. 장례위원장은 대한가수협회 감사 서수남이, 장례위원은 협회 임원 이사진이 맡았다.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며 화장 후 고인의 유해는 두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에 안장될 예정이다.

한편 현미는 지난 1957년 현시스터즈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칼춤 무용수로 무대에 올랐지만, 당시 일정을 펑크 낸 어느 여가수의 대타로 마이크를 잡으면서 가수가 됐다. 이후 ‘밤안개’를 비롯해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등 히트곡을 발표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로 활약했다.

특히 1962년 발표한 ‘밤안개’로 큰 인기를 누렸고 남편 이봉조와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몽땅 내 사랑’ ‘무작정 좋았어요’ 등 연이어 히트곡을 발표했다.

그는 2007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연 기자회견에서 “80년이든 90년이든 이가 확 빠질 때까지 노래할 것”이라며 “은퇴는 목소리가 안 나오게 되면 할 것이다. 멋지고 떳떳하게 사라지는 게 참모습”이라고 음악 활동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대표곡인 ‘떠날 때는 말 없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현미는 예고도 없던 비보로 세상과 영영 이별했다.

jayee21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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