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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가수 겸 배우인 故 구하라(28)는 K팝 시스템의 ‘결정체’ 같은 아티스트였다. 17세에 그룹 카라 멤버로 데뷔해 국내 뿐 아니라 일본 등 아시아권에서도 큰 인기를 끈 ‘한류스타’였고, 독보적 비주얼과 끼로 ‘천상 아이돌’로 불렸다.

그런 구하라가 세상을 떠난 뒤 가요계와 사회에 남긴 메시지와 질문이 적지 않다.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모아 구하라가 세상에 던진 화두를 정리해 보았다.

◇아이돌의 잇따른 죽음, 맞춤형 ‘멘탈 케어’ 필요성 제기

구하라는 지난달 14일 세상을 뜬 故 설리와 친한 동료였다. 설리가 세상을 떠난 지 한달여 만에 그와 친했던 구하라가 세상을 떠나며 아이돌의 잇따른 죽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엔 심리적 문제를 호소하는 아이돌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아이돌그룹 트와이스의 미나와 세븐틴의 에스쿱스가 불안 장애를 호소하며 활동을 잠정 중단했고, 드러난 것보다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앓는 아이돌이 훨씬 많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아이돌 중 정신과 치료나 심리상담을 받는 이가 많지만 일반인과는 조금 다른 특수한 상황에 놓인 연예인 전문 상담인이나 치료 방식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아이돌의 경우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나 환경이 일반인과는 다소 다르다. 소속사에서 아무리 관리를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아이돌에 맞는 상담, 치료법 등이 아직은 부족해 보인다”고 말했다.

◇‘악플’의 무자비한 공격, 아이돌에 큰 상처

‘악플’이 연예인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한 관계자는 “연예인은 정치인과 더불어 대중의 분노 배설구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정치인과 달리 연예인의 경우 아직 자아나 가치관, 자존감 등이 완성되지 않은 10대 때 연예계에 데뷔한 탓에 악플 등 무자비한 비판과 비난에 직면했을 때 정신적으로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유독 연예인에게만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다”고 지적했다.

구하라는 지난 6월 SNS에 직접 “연예인 그저 얻어먹고 사는 사람들 아니다. 그 누구보다 사생활 하나하나 다 조심해야 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앓고 있다”며 “여러분의 표현은 자유다. 그렇지만 다시 악플 달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볼 수 없을까요”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설리 사건 후 약 한 달 만에 구하라가 사망하자, 이제 ‘실명제’ 등 관련 법 제도 보완 및 개정을 미룰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포털사이트 다음은 최근 연예 기사 댓글난을 잠정적으로 폐지하기도 했다.

악성댓글 작성자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동시에 수사 문턱도 낮춰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K팝 시스템’의 문제점은 없나?

K팝 아이돌로 데뷔하고, 성공하는 것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가차없는 ‘무한 경쟁’, 잔혹한 ‘서바이벌 시스템’에 직면해야 하고, 길게는 십수년간 끝이 보이지 않는 연습에 매진해야 한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운과 때가 맞지 않으면 아이돌 데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데뷔에 성공하는 것과 ‘스타’가 되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데뷔에 성공하지 못하거나 데뷔에 성공했더라도 인기를 얻지 못한 연습생, 혹은 아이돌은 이십대 초중반 나이에 ‘인생의 꿈’을 접어야 하고, 운좋게 인기를 얻더라도 아이돌의 ‘수명’은 그 어느 직업보다 짧다.

한 관계자는 “아주 어린 나이에 꿈을 위해 모든 걸 걸어야 하고, 성공 확률은 희박한 K팝 시스템이 연습생, 아이돌의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있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시스템 자체의 가혹함, 무자비함이 문제라면 이후 ‘멘탈 케어’는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닐 수도 있다. K팝 연습생 시스템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트 폭력’-‘성폭력’에 대한 사회의 시선

구하라는 지난해 전 애인인 헤어 디자이너 최종범을 협박, 강요, 성폭력 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했다. 지난해 9월 최씨가 구씨와 다투는 과정에서 구씨의 팔과 다리에 타박상을 입히고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한 혐의다.

1심 재판부는 최씨의 상해, 재물손괴, 협박, 강요 등 혐의는 유죄로 봤지만 불법 촬영 혐의에는 무죄판결을 내렸다. 피고인이 피해자 동의없이 촬영한 것은 맞지만 당시 피해자가 제지하지 않았고 몰래 촬영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금품을 요구하거나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갖게 하지도 않았다”고도 했다.

구하라가 협박을 당한 것이 인정됐지만, 구하라는 재판과정에서 끊임없이 2차 피해를 봤다. 온라인에서는 범죄 그 자체가 아니라 동영상의 유무에 대해 호기심을 표하는 등 성희롱이 이어졌다.

소설가 공지영은 지난 26일 자신의 SNS에 이 재판을 진행한 오모 부장판사를 겨냥해 “그 동영상을 왜 봤을까 얼마나 창피한 지 결정하려고? 그러고 나면 원고인 구하라는 판사 얼굴을 어떻게 보나? 판사가 신인가?”라며 분노했다.

공 작가의 SNS에는 오 부장판사가 판결문에 구씨와 최씨가 성관계를 가지던 사이였다는 내용을 설명하면서 ‘최종범에 따르면’이란 문구와 함께 성관계를 나눈 구체적 장소와 횟수까지 담았다고 지적했다.

공 작가는 “나이가 이렇게 든 나도 이 정도면 죽음을 생각할 거 같다. 대체 이게 무슨 종류의 지옥같은 폭력인가”라고 언급했다.

우리 사회 전반의 데이트폭력과 성폭력, 성인지 감수성 등 고민거리를, 구하라의 재판이 제공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monami153@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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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진 채로 발견된 가수 고 구하라의 일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 영정. 사진 | 사진공동취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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