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효원 기자] 농사꾼이던 아버지가 지난해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의 농지가 내 앞에 놓였다. 외동도 아닌데, 농사를 짓자고 하니 2남들은 “농사 못 해, 당장 땅 팔라”며 펄쩍 뛰었고, 농지는 2녀들의 차지가 됐다.

강원도 산골에 자리한 고향 집은 이북에서 내려온 할아버지가 산골 처녀에게 장가들어 자리 잡은 곳이다. 6.25 피란에서 돌아와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흙집을 지었다. 방 3칸과 부엌이 딸린 20평도 안 되는 작은 집에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고모들까지 5남매가 자랐고, 할머니의 친정어머니, 할아버지의 형님 내외까지 수많은 사람이 들고 났다. 엄마가 시집온 후 우리 4남매도 사랑방에서 태어났다.

막냇동생이 태어나던 날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추석날이어서 온 식구들이 모여 떠들썩했는데 엄마가 내게 마을에 가서 할머니를 찾아오라고 했다. 아기가 나올 것 같다고. 놀라서 동네를 뛰어다니며 할머니를 찾았는데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큰일 났다 싶어 거의 울면서 집에 뛰어 들어갔더니 할머니가 부엌과 방을 분주히 오가고 있고 엄마 옆에는 아기가 누워있었다. 아기가 덮고 있던 꽃무늬 수가 곱게 놓인 보라색 이불도 기억난다.

시골집을 팔고, 농지를 팔고 나면 고향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5도 2촌, 왕복 5시간, 장거리 농사가 시작됐다.

4월 5일 식목일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처음 하는 농사니까 부지런히, 철저히, 완벽하게 해보자, 다짐하고 농사 카페부터 가입 완료. 골프 유튜브를 보고 골프채를 쇼핑하던 일상이 바뀌었다. 농사 유튜브를 보고 괭이를 쇼핑하기 시작했다.

모든 농사는 땅을 뒤집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여동생과 괭이로 텃밭을 파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동네 분이 물어본다. “로타리 쳐야지유?”

로터리 클럽, 영등포 로터리는 들어봤어도 로타리는 처음이다. 로타리는 흙을 뒤집어 통기성이 좋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과거에는 소가 끄는 쟁기질로 농사를 했다면 요즘은 관리기나 트랙터로 쟁기질하는 셈이다. 트랙터가 몇 번 오가자 밭이 화장한 얼굴처럼 곱고 매끈해졌다. 농사 역시 ‘장비빨’임을 절실히 깨닫게 된 날이었다.

로타리도 쳤겠다 여동생과 본격적으로 이랑을 만들고 모종을 사다 심기 시작했다. 상추와 케일, 고추, 땅두릅, 곰취 모종을 사서 정성껏 심어주었다.

4월의 텃밭에는 이상하게도 동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동네 분들은 주5일을 철저히 지키는 걸까?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소됐다.

마을 초입에 있는 5촌 아재네 집에 놀러 간 날, 아재는 우리의 행적을 듣더니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4월에 심었다가 서리 맞아서 싹 죽인 다음에는 4월엔 아무것도 안 심어. 5월 5일은 돼야 써. 5월 10일이면 더 확실하지.”

추운 지역인 강원도는 4월에도 서리가 내릴 때가 있기 때문에 5월은 돼야 농사가 시작된다는 말씀이었다. 어쩐지 동네 어르신들의 텃밭이 다 비어있더라니.

4월 5일이 식목일이라면 5월 5일은 식모일(모종 심는 날). 이날에 맞춰 모종을 심어야 얼어죽는 걱정 없이 안심할 수 있다.

어린이날이 되자마자 장날에 가서 수박, 참외, 토마토, 가지, 호박 등 모종과 종자 씨앗을 잔뜩 사왔다. 돈을 쓰면서 버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 신기했다. 채소값이 비싸니까 심기만 하면 이득!

eggrol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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