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바티칸(이탈리아) = 박효실기자] “신부님이 주교 돼서 너무 좋다. 김대건 신부님은 충청도 최초의 신부님이시고, 신부님은 충청도 최초 주교니까 잘 사시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첫번째 추기경이자 온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큰 어른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20년전 유흥식 추기경이 52세에 주교로 임명되자 이런 특별한 축사를 해줬다고 한다. 지나고 보니 모든 일은 다 운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난 16일(현지시간) 전세계 가톨릭의 본산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봉헌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 기적의 구슬을 꿴 인물이 바로 김대건 신부의 까마득한 충청도 후배 신부 유흥식(72) 추기경이다.

스물여섯의 청년 김대건 신부가 희광이의 칼날에 스러진 지 꼭 177주년이 되는 이날, 김 신부는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신앙 후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총 400명의 사제, 수도자, 순례객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특별 알현했고, 성상 설치 기념 미사 봉헌과 제막식이 이어졌다. 갓에 도포를 입은 성인의 모습이 마침내 공개되자 현장에서는 탄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한국 가톨릭의 경사이자 대한민국의 경사였다.

하루 전날인 15일 바티칸에서 만난 유흥식 추기경은 “중·고등학교가 대건 학교였다. 김대건 신부님 축일에는 미사만 하고 쉬는 날이라 좋아했다. 짧고 굵게 살다 간 신부님의 삶을 알게 된 뒤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매일 기도하며 대화했다”라며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성인과의 인연에 벅찬 감회를 전했다.

유 추기경의 인생에서 조선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라는 이름은 인생의 나침반과도 같았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충남 논산 대건중학교, 대건고등학교를 나왔다. 사춘기 소년의 가슴에 들어온 청년 김대건의 삶은 그를 사제의 길로 인도했다.

삼십 대 보좌신부 시절에는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솔뫼성지 피정의 집 관장을 4년간 맡은 덕에 ‘솔뫼신부’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그 인연으로 대전교구장 시절인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과 솔뫼성지 방문을 성사하기도 했다.

교황과 맺은 인연은 유흥식 추기경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지난 2021년 8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에 올랐다. 애초 교황은 “6월에 (임명을) 발표하겠다. 바티칸으로 와서 함께 일하자”라고 했지만,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행사를 총괄하고 있던 유 추기경은 “이 일만 마무리하고 가겠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8월에야 유 추기경은 바티칸으로 향했고, 8월21일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미사는 교황의 배려로 성 베드로 성당 대성전에서 봉헌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전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 추기경은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바티칸에 모시고 싶다”라는 오래 마음에 품었던 소망을 고백했고, 교황은 “굿 아이디어”라며 화색 했다.

교황의 허락부터 성상이 건립되기까지 지난 2년여의 우여곡절을 되돌아본 유 추기경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는구나 체험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으면 아마 시작도 안 했을 거다”라며 웃었다. 대성전에 성상 건립을 허가받는 것부터 어디에 세울지, 누가 만들지, 하나부터 열까지 설득과 회의의 연속이었고,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 뼈를 깎는 노고 끝에 지난 5일 새벽 마침내 6톤 무게의 성상이 기중기에 들려 성 베드로 대성당 우측의 성당 지하 묘지 출구 인근 벽감에 세워졌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바티칸에 오는 감격의 날이었다. 유 추기경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모두가 보고 기뻐했다. 제막식에서 보통 2명이 줄을 잡아당기는데, 이번에는 한국의 평신도 2명에게 맡길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고위 관계자를 대신해 평신도 2명이 제막을 한다는 것도 특별하다. 한국은 세계 가톨릭에 유례없는 자생종교로서 천주교가 뿌리내린 곳이다. 독학으로 천주교를 익힌 이벽, 제 발로 청나라에 가서 예수회 신부의 세례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 천진암에서 천주교 교리 토론을 벌였던 정약용, 권일신 등 240년 전 조선에서 불었던 이 기묘한 학구열이 한국 천주교의 모태가 됐다.

선교사가 파견된 적도 없는 나라에서 “성사를 볼 수 있게 사제를 보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받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뒤늦게 조선대목구를 설치했다. 평신도가 먼저 일어서고 사제가 뒤를 따르는 이 독특한 조선의 천주교사를 생각하면 평신도가 제막식의 줄을 잡는 건 마땅한 일인지도 모른다.

유 추기경은 “김대건 신부는 25년26일이라는 참으로 짧은 삶을 살다 가셨다. 하지만 그의 패기, 용기, 담대한 마음까지 삶의 모습은 정말로 대단하다. 많은 이들이 성인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본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약 8000명이 순교한 병인박해를 비롯해 100년간 이어진 혹독한 박해로 무려 1만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교회는 2022년 기준 등록신자 590만명(한국천주교회 통계)의 아시아 중추 교회로 성장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24절)라는 성경 구절이 그대로 이뤄진 셈이다.

유 추기경은 “니케아에 모시는 성상은 대부분 수도회를 창설한 성인·성녀다. 이번에 김대건 신부님은 그 원칙마저 깨뜨렸다. 수도회 창설자가 아닌데 성상이 세워졌으니 이 또한 새로운 역사다”라고 말했다. 가톨릭 1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 역대 교황이 묻혀있는 지하묘지 출구에 위치한 니케아는 마치 김 신부를 기다린 듯 200년 이상 비어있었고, 이번에 비로소 자리의 주인을 찾았다.

한국교회의 위상을 전 세계에 떨친 성상 건립을 마친 유 추기경은 이제 김대건 신부를 세계적인 성인으로 알리고 그 정신을 전파하는데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 본당에서 김대건 신부의 삶을 다룬 영화 ‘탄생’을 상영했으면 하는 꿈이 있다.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해외로 나가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개봉된 영화 ‘탄생’(박흥식 감독)은 15세의 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돼 10년 만에 조선 최초의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의 불꽃 같은 삶을 다뤘다. 배우 윤시윤, 안성기, 윤경호, 이문식, 백지원, 김강우 등이 출연했다.

김대건 신부는 지난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유 추기경은 “지금까지는 한국의 김대건 신부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세계적인 인물을 세계적으로 알렸으면 하는 소망이다. 어떤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오직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용기와 기백을 보여준 김대건 신부를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본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gag11@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