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정정용 감독 \'미소 가득\'
정정용 U-20 대표팀 감독이 지난 17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U-20 월드컵 준우승 환영식에서 단상에 오르고 있다.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우치=스포츠서울 정다워기자·김현기기자]“16강이요? 일본보다 우크라이나 원했죠. 허허…”

서울광장에서 잠시 만난 그는 “아직 거리를 다녀보지 못해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정·정·용. 지난 5월5일 어린이날, 어린 태극전사들과 함께 조용히 폴란드로 떠났던 한 축구 지도자는 한 달 보름 만에 한국 축구를 넘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리더십을 열어젖힌 인물로 돌아왔다. “비판과 비난은 선수들이 아닌 내게 해달라”는 그의 외침이 주는 울림이 크다. 정 감독과 U-20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치른 7경기는 단순한 축구 경기들의 조각 모음이 아니었다. 주춤했던 한국 사회에 다시 힘찬 활력을 불어넣은 희망이었다.

스포츠서울은 국내 스포츠 전문지 가운데 유일하게 한 달 가까이 정정용호의 훈련 및 U-20 월드컵 모든 경기를 생생하게 취재,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폴란드로 떠날 때만 해도 주목받지 못했던 그들이 어떻게 국민들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됐는지를 매일 지면과 온라인으로 전달했다.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취재 중심에 정 감독이 있었다. 출국 직전, 폴란드 현지에서 틈틈이 정 감독을 단독 취재한 내용 가운데 지면으로 소개하지 못했던 부분을 재구성해 ‘신화’의 뒷얘기를 공개한다. 때로는 한 팀의 리더로서, 때로는 한 남자로서 그가 펼친 고뇌와 생각이 깊게 묻어 있다.

◇ 7분 만에 첫 실점 “멘붕 왔지만 자신 있었다.”

사실 정정용호의 출발은 시원하지 않았다. 지난 달 25일 포르투갈과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전반 7분 만에 상대 공격수 트힌캉에게 한 방을 얻어맞고 실점했기 때문이다. 얼마 뒤 한 골을 더 내줬으나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으면서 천만다행으로 추가실점을 면했다. 후반엔 경기력을 회복하면서 스코어를 유지하면서 0-1로 패했다. 정 감독은 “멘붕(맨탈 붕괴)이 왔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솔직히 실점하기 전까지 골키퍼 이광연이 볼 한 번 못 잡을 정도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너진다는 생각은 절대 안 들었다”고 돌이켰다. 정 감독은 대회 직전 폴란드 현지에서 에콰도르와 평가전을 했다. 이강인의 골이 터져 1-0으로 이겼는데 승리 만큼이나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정 감독은 “우리가 준비한 5-3-2 포메이션에 선수들이 잘 녹아들었다는 판단이 섰다. 첫 골을 내준 뒤에도 이 고비를 넘어가면 잘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대로 한국은 포르투갈전보다 2차전 남아공전을, 남아공전보다 3차전 아르헨티나전을 더 잘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곡차곡 써내려갔다.

◇ 일본전? 우크라이나와 16강 원했다

남아공과 2차전을 1-0으로 이겨 F조 2위가 되자 B조 2위 일본과 16강전에서 붙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김칫국’이란 비난이 쏟아졌지만 한국은 아르헨티나까지 2-1로 잡고 16강 한·일전을 완성했다. 정 감독은 일본을 이긴 뒤 “난 일본이 아니라 다른 팀을 생각하고 있었는데…”라고 고백했다. 그 팀이 바로 결승에서 만났던 우크라이나였다. 정 감독은 “솔직히 F조 2위를 예상하지 못했다. 3위로 16강에 갈 것으로 봤는데 우크라이나를 만날 확률이 높아서 그 팀을 만난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정정용호는 지난 3월 스페인 전지훈련 때 우크라이나와 한 차례 평가전을 했다. 결과는 0-1 패배였다. 하지만 한국은 이강인(소속팀 차출 반대), 조영욱, 전세진(U-23 아시아선수권 예선 참가) 등이 스페인 전훈에 가지 못해 U-20 월드컵 전력의 절반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는 U-20 월드컵 멤버들이 상당수 3월 한국과 평가전에도 나섰다. 정 감독은 “상대 전술이 단순해서 우크라이나를 원했다”고 했다. 운명은 묘하다. 두 팀은 결승에서 만나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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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용 U-20 대표팀 감독과 이강인이 지난 15일 폴란드 우치에서 U-20 월드컵 결승전 기자회견을 하던 중 서로를 보며 웃고 있다. 제공 | 대한축구협회

◇ “광종이 형, 우리 팀의 별이 되어주세요”

숙명의 한·일전을 하루 앞두고 정 감독은 한 사람을 끝없이 생각했다. 지난 2016년 별세한 고(故) 이광종 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2001년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전임지도자 1기로 입문해 2009년과 2011년, 2013년 등 3번의 연령별 월드컵 지휘봉을 잡고 8강 두 번, 16강 한 번의 성과를 일궈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지휘봉을 잡아 28년 만의 금메달 획득도 이끌었다. 정 감독은 ‘롤모델’ 이 감독 밑에서 U-17 대표팀 코치 생활도 했다. 이 감독의 별명이 바로 ‘축구계의 이순신’이었다. 10차례 넘는 일본전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천 아시안게임 8강에서도 일본전 승리로 우승 초석을 닦았다. 정 감독은 “일본이 광종이 형 때문에 연령별 월드컵에 거의 못 나갔다. 아시아 대회 본선에서 한국에 번번이 졌기 때문이다. 유소년 전임지도자들끼리 ‘일본전 땐 광종이 형을 벤치에 앉혀놓기만 해도 된다’는 농담까지 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일본전 전날 ‘광종이 형이 우리 팀의 별이 되어 지켜달라’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그게 통했나보다. 일본의 슛이 골대에 맞고 나가더라. 일본을 이긴 직후 인터뷰 땐 차마 그 얘길 못 하겠더라”고 뒤늦은 고백을 했다.

◇ 이강인 삼고초려 발언, 욕 많이 먹었다

에이스 이강인의 합류는 정정용호가 세계 무대에서 펄펄 나는 기폭제가 됐다. 지난 3월 국가대표팀에 뽑힌 이강인이 두 칸이나 내려간 U-20 월드컵에 갈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사실 적었다. U-20 월드컵은 의무 차출 대회도 아니어서 이강인 소속팀인 스페인 라리가 발렌시아가 협조할 의무도 없었다. 그런 이강인이 왔다. 그 것도 대회 개막을 한 달 앞둔 4월23일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훈련과 연습 경기, 폴란드 전훈을 다 소화하고 대회에 임했다. 이강인은 U-20 월드컵에서 2골 4도움을 폭발시키며 2005년 리오넬 메시 이후 14년 만에 18세 선수가 U-20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하는 위업을 이뤘다. 이강인 차출에도 뒷 얘기가 있다. 정 감독은 지난 3월 “이강인이 올 수 있다면 발렌시아에 절을 세 번 해서라도 데려 오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이 말은 적지 않은 이슈가 됐는데 정 감독 자신은 욕을 좀 먹었다. “그렇게 얘기했는데 이강인이 안 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핀잔이었다. 발언이 너무 앞서나갔다는 뜻이다. 정 감독은 이강인이 대회 기간 중 펄펄 날자 “난 이강인이 올 것으로 믿었다. 나도 간절했고, 이강인도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강인이 제대로 합류해서 잘 하니까 아무 소리 없네?”라며 싱긋 웃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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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용 U-20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 달 23일 훈련 중 작전판을 통해 선수들에게 전술을 설명하고 있다. 제공 | 대한축구협회

◇ “내려놓고 버리니까 되더라”…13년의 기다림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두 차례나 역임한 이용수 세종대 교수는 “정 감독이 이렇게 잘 되니 내가 정말 기쁘다. 정 감독이 고생을 말도 못하게 했다”고 반겼다. 2006년 대한축구협회 유소년 전임지도자로 이 세계에 발을 내딛은 그는 13년간 무명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연령별 대표팀에서도 두 번이나 도중 하차 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4년엔 연령별 대회 아시아 예선을 통과하고도 본선에 앞서 물러나는 아픔을 겪었다. 전임지도자를 잠시 내려놓고 프로에 간 적도 있었다.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축구인들이 추천, 유소년 지도에 복귀할 수 있었고 다시 어린 선수들과 호흡했다. 정 감독은 “날 내려놓고 내 욕심 버리니까 원했던 것이 오더라”고 했다. 자신의 자리를 내주고 한 달간 속을 태울 때 그의 아내가 해준 “내려놓으라”는 말이 큰 위로와 교훈이 됐다. 정 감독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것을 하다보면 좋은 일이 오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준비만 잘했다”고 했다. 정 감독이 지금 말하는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네요”의 숨은 원동력이다.

◇ 이 팀과 다시 한 번? “아닙니다”

정 감독은 17일 서울광장 환영식 때 “아시아선수권과 U-20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했다. 3년 뒤 아시안게임에선 금메달을 따서 헹가래를 받고 싶다”는 바람을 표시했다. 하지만 귀국 전 본지와 소통할 땐 U-20 대표팀을 2년간 맡아 키운 것에 대한 피로감 혹은 허탈함도 드러냈다. 정 감독은 “이 팀하고 잘 됐으니 계속 해야죠?”란 질문에 “아니오”라고 딱 잘라 말한 뒤 “너무 힘들었다. 편두통도 심해졌고, 한 쪽 귀도 안 들린다”고 털어놨다. 선수들은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뭔가 지도자 인생의 분위기 전환을 하고 싶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축구계에선 “고생한 만큼 정 감독에 대한 대우가 확실히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지도자 정정용’ 인생의 2막은 어떻게 흘러갈까. 정 감독은 정상에서 새 길을 찾고 있다.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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