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유승민
유승민 IOC 선수위원 겸 대한탁구협회장이 스포츠서울 창간 34주년 인터뷰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2004 아테네올림픽 탁구
유승민이 지난 2004년 8월23일 아테네 하계올림픽 탁구 남자단식 금메달을 차지한 뒤 중국의 두 강자 왕하오(왼쪽·은메달) 왕리친(동메달)을 양 옆에 두고 웃고 있다. 아테네 | 강영조기자

[스포츠서울 이지은기자]“집을 나서는데 둘째 아들이 ‘오늘도 안 들어오느냐’고 묻더라고요.”

유승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은 시간을 쪼개 쓰는 삶에 익숙하다. 스포츠행정가로 살면서도 선수촌 생활 못지않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40분 남짓 진행된 스포츠서울과의 창간 인터뷰 중에도 그의 휴대전화에는 셀 수 없이 불이 들어왔다.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들이 금세 쌓였고, 부재중 전화도 여러 통 찍혔다. 그때마다 화면에는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이를 바라보던 유 의원은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는 게 생활이 된 것 같다”고 미안해했다. 하지만 “내가 이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가족 덕분이다. 갑자기 일이 몰려오고 있지만 다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수락했다”는 말에 이내 힘이 실렸다.

현역 시절 유 위원은 한국 탁구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탁구 신동으로 불리며 각종 국제대회에서 트로피를 쓸어담았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세계 최강인 중국의 벽을 넘고 금메달을 땄다. 은퇴 후에는 탁구를 넘어 체육 전반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국제탁구연맹(ITTF) 집행위원, 2018 평창기념재단 이사장, 대한체육회 선수촌혁신위원장, 대한탁구협회장까지 국내외를 망라한다. “부지런하다는 게 내 최대 강점”이라던 유 의원은 “도전해보지 않고 포기한다는 건 선수 때부터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모두 소화할 준비가 돼 있는 상태다. 오히려 여러 일을 접목시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유승민
유승민 IOC 선수위원이 지난 2016년 8월22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에서 열린 하계올림픽 폐막식에서 당선 인사를 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말로만 듣던 IOC…실제로 가보니?

2016년은 유 의원에게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IOC 입성의 꿈을 이뤘기 때문이다. 당초 다른 후보들에 비해 인지도가 밀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16 리우 올림픽에서 직접 발로 뛰며 전 세계 선수들의 표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IOC 위원으로 일한 지난 3년을 “예선 없이 본선만 이어지는 대회”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압박감이 심하다는 얘기다. “IOC 밑에는 국제경기연맹(IF), 국가올림픽위원회(NOC)를 비롯해 파생 조직이 정말 많다. 거기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체육인들이 어우러져 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무궁무진한 일을 하며 전 세계 스포츠를 이끌어가고 있다. 드러나는 직책만 보고 나를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치열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게 임하려고 하지만 결코 쉬운 일들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2028 LA 올림픽 조정위원이자 교육위원으로 새로운 경험을 쌓고 있다. IOC 조정위원회는 동·하계올림픽 유치지로 선정된 도시 올림픽조직위원회가 하는 모든 일을 관리·감독한다. IOC 교육위원회는 올림픽 가치에 기반을 둔 스포츠 교육과 관련한 전략적 방향을 제시한다. 유 의원은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하고 있다. 이런 소중한 경험을 혼자 누리고 싶지 않다. 후배 선수나 동료 지도자들과 공유하고 싶다”며 ‘국가대표’로서의 또 다른 책임감을 노래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IOC 위원 입성 소식엔 반가움을 전하면서도 ‘선배’ IOC 위원으로서 책임감도 동시에 거론했다. “왜 한국에서 IOC 위원이 더 안 나오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분명 도움이 되는 일이다. 대한수영연맹, 대한카누연맹, 올림픽 선수단장 등 다양한 경험을 갖춘 분”이라면서도 “(심석희 사건 등)대한체육회가 헤쳐나가야 할 도전 과제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잘 헤쳐나가야 안팎으로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쓴소리도 했다.

[포토] 유승민
유승민 IOC 위원 겸 대한탁구협회장이 스포츠서울 창간 34주년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한국 탁구의 ‘포스트 유승민’을 찾아서

유 위원은 지난달 마음의 고향으로 금의환향했다. 조양호 전 대한항공 회장이 별세하며 공석이 된 대한탁구협회장 자리에 신임 회장으로 당선된 것이다. 선거인단 198명의 158표 중 119표를 얻으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국 탁구계의 쇄신을 향한 기대가 반영된 수치다. 임기는 1년 7개월이다. ▲탁구협회 조직 안정화 ▲내년 부산 세계선수권대회 성공 개최 ▲생활 탁구 랭킹에 따른 부수 등록제 추진 ▲실업 탁구 프로리그 출범 등 주요 공약을 실현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기간이다. 신임 탁구협회장으로서의 발걸음은 그래서 더 바쁘다. 유 위원은 “당선되자마자 선수, 지도자, 심판 등 많은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들었다. 갈 길이 험난할 것 같다. 해야 할 일이 많고 책임감이 크다”며 “사무처 일도 들어와서 보니 여의치 않은 부분이 많다. 그동안 비난을 받아왔지만 어쨌든 탁구계를 위해 헌신하시는 분들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결국 내가 하기 나름이다. 조직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수 있다”고 다짐했다.

산적한 난제 가운데서도 최우선과제는 ‘생활 탁구’에 있다. 유 위원은 “생애 체육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데이터베이스가 전혀 없다. 탁구의 저변을 넓히려면 체계적인 인증제가 필요하다. 엘리트체육과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여러 공약가운데 임기 내에 할 수 있는 것은 두 개 정도인 것 같다. 그 기간에 인정받는다면 욕심은 없지만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재선에 도전할 뜻도 일찌감치 내비쳤다.

‘중국 귀화선수’에 대한 국내 반대 의견에 대해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선수 개인이 아니라 그를 활용하지 못하는 환경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유 위원은 “일본 탁구의 성장은 귀화선수로부터 비롯됐다. 은퇴 후에도 그들을 조국으로 돌려보낸 게 아니라 지도자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줬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 중국 탁구의 좋은 점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서 경쟁력을 끌어올리느냐가 중요하다. 문을 여닫는 문제는 이후에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을 거쳐간 수많은 귀화선수들 이름이 등장했다. 그는 “일본은 중국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격차가 줄었다. 내년 도쿄올림픽을 위해서도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에서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면서도 “우리도 신설되는 혼합 복식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여자는 일본에 많이 뒤처지지만 남자는 오히려 승률이 앞선다. 전통은 무시 못 한다. 금메달이 나올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포스트 유승민’을 찾기 위한 노력은 말 뿐만이 아니다. 내년 대회까지 다양한 스파링 파트너를 찾기 위해 미국과 유럽을 수소문하고 있다.

[포토] 유승민
유승민 IOC 선수위원 및 대한탁구협회장이 스포츠서울 창간 34주년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 “엘리트 체육 개혁안, IOC 헌장 본 받아야”

유 위원은 ‘엘리트 체육인’을 대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날 선 발언도 서슴없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가 내놓은 학교스포츠 관련 권고안에도 “급히 먹는 밥은 체한다”는 소신을 확실히 밝혔다. ▲주중 대회 금지 ▲합숙 폐지 ▲소년체전 개편 등 학생 선수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급진적인 개혁은 현장의 혼란만 가져온다고 꼬집었다. 이를 위해 최근 IOC 교육위원회에서 발표한 ‘선수 권리·책임 헌장(Athletes‘ Rights and Responsibilities Declaration)’을 내밀었다. 그는 “이 권고문은 4차까지 이뤄진 조사를 바탕으로 매 단계 회의를 거쳐 오랜 시간을 들여 마련됐다. 선수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기 때문에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쳤다.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며 후폭풍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며 “개혁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다. 이미 인격 말살과 인권 유린을 통해서는 선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급하다. 우리도 스스로 개혁할 준비가 돼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체육인 스스로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유 의원은 “사실 나는 이제 2선으로 빠진 체육인이다. 하지만 내가 잘나서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다. 운동선수로서 지금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들여다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최근 체육 개혁에서 엘리트선수 출신들이 오히려 배제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체육인들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첫 번째 변화가 돼야 한다. 그러면 이렇게 사회적 쟁점이 될만한 창피한 일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개혁을 당할 일도 없다”고 마지막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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