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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 저작권료 수입 1위, 2016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선정 대중음악 작곡과 편곡 부문 저작권료 1위. 저작권 등록된 곡수만 576곡.’

작곡가 조영수의 이름 앞에는 ‘저작권료 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SG워너비의 ‘라라라’와 ‘내 사람’, ‘가슴 뛰도록’을 비롯해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신화의 ‘브랜드 뉴’, 오렌지캬라멜의 ‘아잉’과 ‘마법소녀’,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 등 히트곡 제목을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차다.

그러나 한때 일년에 80곡씩 작곡하던 그는 지난 2013년부터 작업량을 년간 10곡 내외로 확 줄였다. 누군가는 ‘슬럼프’라고 하지만 그는 ‘더 큰 도약을 위해 숨을 고르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작곡가에서 제작자 겸 프로듀서로 본격 전환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대표 프로듀서로 있는 넥스타엔터테인먼트를 YG엔터테인먼트처럼 ‘아티스트 이미지’ 강한 기획사로 바꾸는 게 그의 목표다.

-가요계에 데뷔한 계기가 궁금하다.

199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문세가 진행하던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인기 코너인 별밤 뽐내기 대회에서 친구들과 보이즈투맨의 ‘잇츠 하드 투 세이 굿바이 투 예스터데이’를 불러 상을 탔다. 프로그램에서 김건모씨가 건반을 쳐줬다. 고등학교 때 흑인 음악에 심취했었다. 대학교에 가서 그 친구들과 1996년 그룹 ‘열두 번째 테마’를 결성해 MBC 대학가요제에서 ‘새로나기’란 곡으로 대상을 탔다. 알앤비 아카펠라그룹이었는데 나는 메인 보컬은 아니었고 작곡·편곡·코러스를 맡았다.

-1997년 그룹 ‘열두 번째 테마’의 앨범도 나왔다.

동물원 유준열 선배가 제작자로 나섰는데 앨범은 2만장이 팔렸다. 그때 기준으로는 망했다. 데뷔 동기가 리아, 유리상자인데 우리만 잘 안됐다. 그래도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에도 출연했다. 당시 작곡가 김형석 형을 처음 봤다. 내가 처음 알게 된 대중가요 작곡가였다. 그 형을 보면서 작곡가의 꿈을 키웠다. 음악을 몇개월 하다가 현역으로 군대를 갔다. 팀은 자연스럽게 해체가 됐다. 그렇게 3~4년 자연스럽게 음악을 안하게 됐다.

-최종 학력이 연세대 생명공학 휴학이다.

학교를 3학년 2학기까지 마친 뒤 음악에 매진하겠다고 결심했다. 부모님 반대가 심했다. 무조건 졸업하고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음악을 하는 바람에 학점이 안좋아 원하는 회사에 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절실함이 있었다. 내가 뭘 잘할까 고민하다가 음악으로 승부를 걸자고 결심을 하게 됐다. 원래 게으르고, 날카롭지 못한 성격인데 그때는 적극적으로 돌아다녔다. 김형석 형을 찾아가 내 노래를 들려주는 등 나답지 않게 적극적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없었나.

결정하기 전까지는 불안했지만 시작한 이후엔 불안하지 않았다. 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렸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이 있었나.

음악하는 이들은 대부분 ‘내가 곡을 제일 잘쓴다’는 믿음이 있다. 나는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키웠다. 그 다음엔 항상 자신감이 있었다. 왜 그랬나 생각해보니 선배들의 칭찬을 자주 들어서였던 것 같다. ‘열두 번째 테마’ 제작자 유준열 선배가 ‘너는 생긴 것도 김형석을 닮았는데 앞으로 그만큼 클 수 있겠다’고 말해준게 기억이 난다.

-음악은 재능이 먼저인가, 노력이 중요한가.

솔직히 재능이 51, 노력이 49 정도 같다. 재능이 51%로 더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재능만 있다고 잘되진 않는다.

49%의 노력에는 여러 요소가 포함돼 있다. 음악 이론 공부도 중요하고, 음악 트렌드에 대한 분석 능력도 필수다. 트렌드를 따라가서만은 안되고 때로는 새로운 걸 시도해 리드할 필요도 있다. 그런 전략 구사도 필요하다. 노력에는 인간관계도 포함된다. 낯가림이 심한 게 내 약점이기도 한데, 인간관계를 더 잘 풀어갔다면 어떤 부분을 더 잘했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다.

-2003년 프로 작곡가로 데뷔한 이후 무려 576곡이 저작권 등록돼 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다른 것에 관심이 없고 하나에 빠지면 집요하게 끝까지 가는 성격이다. 한창 작업할 때는 취미도 없고, 여행도 안가고 오직 곡만 썼다. 몸은 힘들지만 내가 쓴 곡이 사랑 받는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쉬면 사이클이 무너질 거 같아서 끊임 없이 곡을 쓰며 그 패턴에서 보람을 찾았다.

물론 많이 놀지 못하고, 여자를 많이 만나보지 못하고, 여행을 못간게 아쉽다. 그러나 일을 열심히 해서 많은 곡이 사랑받았다는 보람은 있다. 앞으로는 일과 힐링할 시간을 병행하려 한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 연속 저작권료 수입 1위를 차지한 ‘저작권료 킹’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 3곡을 꼽자면.

우선 SG워너비의 ‘내 사람’을 꼽겠다. 많은 사람들이 ‘조영수’하면 이 노래를 떠올린다. 2006년 각종 시상식서 작곡가 상을 타는 등 처음으로 작곡가로 인정 받은 곡이다.

발매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사랑 받을 노래는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다. 그때는 재미로 써본 트로트인데 운이 잘 맞아떨어졌다. 단기적으로 보면 아닌데 누적으로 보면 내 노래중 저작권료 효자곡이다. 2009년 나왔을 때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이 사랑 받는다. 노래방 애창곡으로 불리고, 선거 때도 많이 쓰인다. 그곡은 앞으로도 사랑받을거 같다.

얼마전 KBS ‘연예가 중계’에서 대한민국 힐링송 톱100을 꼽았는데 내가 만든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가 7위를 했더라. 그 전부터 여러 의미로 사랑받은 노래라 애착이 있었는데 검증을 받아 뿌듯했다. 자랑스러워 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대학가요제를 통해 가수로 데뷔했고 영화 ‘아는여자’ 주제가 ‘모르죠’, 자신의 앨범에 ‘돌아와줘’ 등에서도 노래도 불렀다. 수준급 알앤비 창법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직접 노래를 부를 생각은.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했다면 계속 했을 텐데, 프로 작곡가가 되고 나서 노래 잘하는 가수들을 보면서 노래하는게 창피해졌다. 내 돈을 주고 처음 공연을 본 가수는 SM엔터테인먼트 유영진 프로듀서였다. 알앤비를 워낙 좋아했는데 ‘그대의 향기’가 나왔을 때 이렇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SG워너비 김진호가 고등학교 때 노래 부르는 걸 보며 난 더이상 노래하지 말자고 마음을 굳혔다.

-어떤 가수와 호흡이 가장 잘 맞나.

제일 편한건 SG워너비다. 서로 잘 알아서 곡 쓰는 것과 녹음도 편하다. SG워너비가 큰 사랑을 받을 때 신기했다. 특별한 장르의 곡을 한게 아니라 템포 빠른 발라드를 했는데 그 스타일이 유행이 되고, 그 음악이 4~5년간 큰 사랑을 받았다.

-큰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곡에 담긴 ‘뽕끼’, 소몰이 창법의 유행을 선도했다는 점 때문에 비난 여론도 있었다.

욕도 많이 먹었다.(웃음) 욕을 먹을 땐 기분이 안좋고 ‘하면 안되나’ 의기소침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서 그런 곡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음악이든 유행하면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항상 존재한다.

monami153@sportsseoul.com

사진 | 넥스타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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