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현의 창과 창 컷

[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한국 체육이 “진짜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탁상공론식 정책을 남발하는 정부 탓이 아니고, 배가 불러 ‘헝그리 정신’이 부족한 선수 탓도 더더욱 아니다. 한국 체육에 불어닥친 진짜 위기는 지도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체육의 저변을 넗히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체육의 질적 변화도 중요하지만 한국 체육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될 가치는 바로 경쟁력이다. 한국 체육은 누가 뭐래도 국제 경기력을 통해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기적의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국민과 함께 그 기쁨을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국민의 DNA에 숨어 있는 한국 체육의 역사요 전통이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랬던 한국 체육이 추락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2018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부터 시작된 경기력 추락은 2021도쿄올림픽과 2022베이징동계올림픽까지 계속 이어졌다. 2018아시안게임에서 6회 연속 아시안게임 2위 유지에 실패하며 3위로 내려 앉은 한국은 이후 두 차례의 올림픽에서도 각각 16위,14위로 추락하며 세계 톱10자리에서도 물러났다. 한국체육은 저변이 얇은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어 자칫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면 경기력 침체가 장기화될 수도 있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하나 하나 따져봐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오는데 필자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해답을 지도자에서 찾는 쪽이다.

한국이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기적의 퍼포먼스를 내는데 상대적으로 지도자의 역할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한국 체육의 독특한 문화탓에 스포트라이트는 온통 선수에게만 쏟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지도자는 다른 나라와 달리 독특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이른바 ‘부모 리더십(parents’ leadership)’이다. 외국의 지도자와 다른 한국 지도자의 ‘부모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일까? 바로 희생과 헌신이다. 선수들을 제 자식처럼 여기며 자신의 가족들을 버리면서도까지도 선수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한국 지도자들의 이러한 리더십은 그동안 철저히 묻혀 있었다. 공기가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마치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치듯이….

한국 체육 지도자들의 가치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진가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과거 한국의 지도자들이 보여준 ‘부모 리더십’은 그야말로 존경스럽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선수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기며 온갖 열정을 다 쏟아 붓는 지도자는 드물다. 다만 그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지도자의 슬픈 가족사는 잊어서는 곤란하다. 선수들에게 부모를 빼앗긴 가족들이 흘린 눈물이란…. 지도자의 가족들은 한국 체육이라는 고귀한 제단에 바쳐진 슬픈 희생양이 됐다. 가족의 희생 위에 지도자는 선수들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었다. 때론 가혹함도 있었지만 그속엔 분명 애끓는 사랑이 꿈틀대고 있었다. 선수와 지도자는 믿음이라는 다리를 통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한국 체육의 진짜 위기는 결국 ‘부모 리더십’이 실종된 지도자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분석은 짜장 틀린 얘기가 아니다. 겉으로는 훨씬 더 민주적이며 세련된 리더십으로 포장돼 있지만 지금 지도자의 리더십은 솔직히 알맹이가 빠져 있는 함량미달이다. 열정은 온데간데없고 헌신과 믿음은 먼 세상 남의 얘기다. 선수와 지도자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그렇고 그런 사이로 전락했다. 기록단축과 상대를 제압하는 건 어찌보면 단순하다. 육체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훈련의 반복이 필수적이다. 인간은 쾌락보다 고통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선수들은 극한의 상황을 회피하려고 하며 지도자는 이를 돌파하도록 강제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지도자의 제 1덕목은 선수와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지도자들의 흐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이미 스포츠를 통해 부와 명예를 다 얻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대다수다. 그래서인지 요즘 지도자들은 더이상 낯을 붉히며 선수를 극한의 상황으로 내모는 일을 꺼리는 게 일반적이다. 지도자들의 열정과 관심의 대상도 달라졌다. 몸은 훈련장에 있지만 머릿속에는 자신들을 가르쳤던 스승과 달리 가족 생각으로 가득하다. 이게 바로 한국 체육의 ‘진짜 위기’를 야기한 지도자들의 문제점들이다.

한국 체육이 국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선 지도자들의 의식 변화가 절실하다. 지금의 지도자는 선수를 열정과 사랑으로 키우는 부모라기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주판알 튕기며 흥정하는 상인(商人)에 가깝다. 지도자와 선수들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맺어진 관계,이게 바로 상인으로 전락한 한국 체육지도자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지도자들의 텅 비어버린 머릿속에 헌신과 애정 그리고 열정의 가치를 꼭꼭 채워넣어야 할 때다.

<jhkoh@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