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 ML 선수가 만든 야구 수신호

2017년, 한화이글스도 제작 보급

국가대표 에이스이자 한국 여자야구선수 최초로 일본 실업팀에 진출한 김라경 선수가 2024시즌부터 스포츠서울 필진으로 칼럼 ‘야!(野) 가치(價値) 놀자’를 연재합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야구를 하던 소녀 시절을 벗어나 이제는 어엿한 야구선수가 된 인간 김라경의 모습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우리 다 ‘가치’ 놀아봐요! <편집자주>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청인 학생 야구선수 김라경입니다. 수어로 소통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야구장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파이팅!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우리는 야구를 볼 때 심판의 ‘손짓’ 하나에 울고 웃는다. 9회말 2아웃 주자는 만루, 동점 상황. 풀카운트에서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 판정에 따라 경기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심판의 손을 숨죽인채 바라본다. 야구 진행에 없어서는 안될 심판 판정은 가까이에서도 멀리에서도 알 수 있도록 ‘수신호’로 이루어진다. 시원한 제스처 덕분에 3층 관중석에 앉더라도 세이프인지 아웃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야구 수신호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수신호는 19세기 미국의 한 야구선수로부터 시작됐다. 도루왕, 중견수왕으로 불린 윌리엄 호이(1862~1961), 그는 3살 때 수막염으로 청력을 상실하고 청각장애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선수다.

수어가 흔치 않았던 19세기, 심판 콜을 듣지 못해 실수를 거듭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수신호를 만들고 심판진과 연구해 마침내 판정 수신호를 야구에 정착시켰다. 소리가 아닌 수신호로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그는 각종 기록을 깨며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았다. 윌리엄 호이 덕에 판정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야구를 보는데 불편함을 느꼈던 관중들도 야구를 쉽게 즐길 수 있게 된 셈이다. 그의 노력으로 탄생한 판정 수신호는 야구경기 방식과 역사를 쓰는 계기가 됐다.

수신호 덕분에 야구를 관람하기 편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야구를 이해하고 즐길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 야구와 관련한 표현을 갖지 못한 사람들, 청각장애인 얘기다. “야구를 홈런, 세이프, 아웃 이 단3개의 단어로 야구를 표현할 수 있는가?” 반평생 야구 한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서 똑똑한 Chat GPT에게 물었다.

“….”

똑똑하게 알려주고 싶은데 지(G)씨도 말문이 막히나 보다. 어떤 전문가에게 물어봐도 단 세 개의 단어로 야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불과 2016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청각장애인 약 32만명(2021기준)은 국립국어원에 등록된 야구 수어 단 세 개(홈런, 세이프, 아웃) 만으로 야구를 봐야 했다.

한화 이글스는 2017년 ‘세상에 없던 말’ 프로젝트를 통해 야구 수어 135개를 만들고, 교육용 영상을 제작해 보급했다. 이를 통해 야구를 이해하고 즐길 수 없던 농인들도 야구 규칙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장애를 만드는 상황을 제거하면,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누구에게는 장애가 될 수 있는 상황은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야구에서는 지속적으로 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19세기 야구 심판의 수신호가 탄생한 최초의 ‘베리어 프리 운동’을 시작으로 2017년 세상에 없던 말, 135개가 탄생함으로써 두번째 장벽이 허물어졌다.

최근에는 ML에서 여성 최초의 단장, 마이너리그 여성 감독, 메이저리그(ML) 독립구단과 계약을 맺은 최초의 여성 선수의 탄생으로 보이지 않던 장벽도 서서히 깨지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미래의 또다른 누군가를 위해 장벽을 향해 망치질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 또한 나만의 망치질을 지속할 것을 다짐하며, 소망해본다. 세상의 없는 말, 여자 프로 야구선수의 탄생을.

※베리어프리’는 장애물을 뜻하는 ‘베리어(Barrier)’와 벗어난다는 뜻의 ‘프리(Free)’의 합성어로, 건축이나 도로 공공시설 등과 같은 물리적 장벽뿐만 아니라 학습 등을 제한하는 제도적 법률적 장벽을 비롯한 각종 차별과 편견, 나아가 장애인이나 노인에 대해 사회가 가지는 마음의 벽까지 허물자는 의미의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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