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효원 기자] 조각가 이길래는 ‘소나무 작가’로 불린다. 소나무 작가로 한정되는 게 싫었다는 작가는 그럼에도 꾸준히 소나무를 조각해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소나무 작가로 이름이 났다.

그의 소나무는 보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동(銅) 파이프를 납작납작 썰어 일일이 용접해 소나무의 위용은 물론 거친 표면까지 표현했다.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지난 25일 개막한 이길래 개인전 ‘늘 푸른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다-생명의 그물망’전에서 작가는 그동안 선보여온 소나무에서 한 걸음 더 깊이 응시한 시선의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를 기획한 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은 “이길래 작가는 기계 문명 상징의 동 파이프를 절단해 수천개를 이어 붙여 소나무 형상을 만든다. 겉이면서 안이면서 다의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더 깊이 있게 확장된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장의 설명처럼 이번 전시에는 기존 소나무에서 더 깊어진 작가적 사유의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이길래 작가는 “그동안 소나무 형태로 자연의 순환성에 관해 얘기해왔는데 이번에는 뿌리를 생각했다. 뿌리는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뿌리가 있어서 생명을 지탱한다.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지구상에 있는 것이 모두 소중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미술관 2층에 놓인 거대한 ‘Millennium-Pine Tree Root 2023-2’가 이번 전시의 고갱이라 할 수 있다. 2층에서 3층까지 기세 좋게 뻗어 올라간 소나무의 위용도 위용이려니와 전시장 바닥을 절반가량 뻗어 나온 뿌리가 압권이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소나무를 창작했지만 뿌리까지 형상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산이 좋아지고, 자연을 더 깊이 응시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길래 작가는 “산을 좋아하게 되어서 히말라야에도 갔다 왔고, 한겨울에도 맨발걷기를 하면서 산을 다니고 있다. 맨발걷기를 하게 되면 발을 디딜 땅을 봐야 하는데, 그러면서 땅을 뚫고 튀어나오는 소나무 뿌리들을 보게 됐다. 그동안은 그 뿌리를 크게 인식하지 않다가 이번에 뿌리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나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뿌리 덕분이지만 우리는 평소 뿌리보다는 꽃과 잎 같은 것들에 시선을 빼앗긴다. 이번 전시는 어쩌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헌사인지도 모른다.

소나무 옆에 무심히 놓여있는 돌덩이도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일깨워준다. 소나무 뿌리와 돌을 어우러지게 한 대규모 설치 조각은 다양한 실험과 탐구, 탐색의 결과물이다.

전시장 4층에는 조각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드로잉이 전시돼있다. 쇠꼬챙이에 잉크를 묻혀 대형 한지에 수천, 수만번 그리고 또 그려낸 소나무 드로잉은 조각 못지 않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어떤 드로잉은 조각으로 이어지고, 어떤 드로잉은 드로잉으로 남아있다. 드로잉과 조각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로잉은 작가의 호흡이라고 생각한다”는 이길래 작가는 “그게 없으면 작가는 죽어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드로잉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조각가에게 재료는 친구 같은 존재다. 이길래 작가에게는 동 파이프가 그렇다. 스테인리스의 차가움이 아니라 따스한 컬러, 마음껏 색깔과 모양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연성 등 측면에서 동 파이프는 매우 인간적인 재료다. “동 파이프를 만났다는 게 나에게는 행운이다. 이제는 친구 같다”는 이길래 작가는 동 파이프와 또 다시 여행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전시는 4월 21일까지 계속된다. eggrol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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