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註 : 50년 전인 1973년 4월, ‘선데이서울’의 지면을 장식한 연예계 화제와 이런저런 세상 풍속도를 돌아본다.

[스포츠서울] 가수 남진과 나훈아는 왜 제명 당했을까.

1960~1970년대 남진과 나훈아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최고 가수였다. 그렇다고 그 시대만의 최고 가수라는 소리는 아니다. 지금도 한국가요사에서 ‘가왕’으로 우뚝 서있는 올타임 레전드 스타다.

1973년 ‘선데이서울’ 236호(4월 22일)는 한국영화인협회가 4월11일 남진과 나훈아를 제명했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실었다. 이에 화가 난 남진이 “전격 배우 폐업을 선언했다”는 소식까지 담겼다.

일이 커지고 있었다. 둘은 가수인데 영화인협회에서 제명이라니… 팬들은 “대체 왜?” 라는 의문과 궁금증이 일었을 것이다.

알고보니 이유는 이러했다. 당대 톱스타였던 남진과 나훈아는 본업 가수 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한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회원이었다.

요새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대세라 비(정지훈), 이승기, 아이유, 수지 등 연기 겸업 가수가 많지만 당시에는 드물었다.

남진과 나훈아는 ‘노래하는 배우’ ‘연기하는 가수’로 겸업 연예인이었던 만큼 잘못이 있는 회원에 대한 협회의 징계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럼, 왜 제명당했을까. ‘선데이서울’이 전하는 당시 제명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당시 영화인협회의 연기분과위원회는 ‘스타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열고 있었다. 이 행사에 두 사람이 출연을 약속하고도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란히 펑크를 낸 것이 이유였다.

더구나 남진은 ‘스타의 밤’ 행사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 ‘남진 리사이틀’을 열어 ‘스타의 밤’ 행사에 재를 뿌린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진 리사이틀은 성황리에 열린 반면 ‘스타의 밤’은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니 속이 상했을 것이고 괘씸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참새(?)들은 ‘스타의 밤’ 출연자 200명이 가수 한 사람을 당하지 못했다는 의미로 ‘200대1 게임’이었다고 꼬집었다는데…. 협회는 무슨 조치든 해야 한다고 결심했을 것이고 그것이 결국 제명으로 나타났던 셈이다.

두 사람의 해명을 들어 보면, 남진은 그날 자신의 리사이틀을 끝내고 ‘스타의 밤’ 무대에 오르려 했으나 선배들 제지로 오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이런 처사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협회 처분에 맞불이라도 놓듯 배우 생활을 접겠다는 ‘배우 폐업’이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남진은 그 무렵에도 ‘언제나 님과 함께’ 등 영화 4편을 촬영 중이었는데 이 작품이 끝나면 배우를 접겠다는 것이었으니 단단히 화가 났던 것 같다. 남진은 이미 50여 편 영화에 출연한, 작품 수로 보아도 톱스타였다.

나훈아도 할 말은 있었다. 지방 공연을 갔던 나훈아는 펑크까지 내면서 상경해 무대에 오르려 했으나 역시 출연을 제지당했다. 제명 처분에 나훈아는 “협회가 제명까지 할 줄은 몰랐고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아쉬움과 불만을 토로했다.

일을 하다보면 돌발사정이 생길 수도 있고, 또 과거 다른 스타들도 지방공연으로 출연을 못 한 적이 있었는데 유독 가수 겸업인 두 사람에게 내려진 가혹한 처분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는게 중론이었다.

‘선데이서울’이 전한 스토리 외에 어떤 속사정이 더 있는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연예인에게 ‘제명’은 중징계 중 중징계였다. 그 시대에는 협회나 방송사 등에서 가수나 연예인에 대한 이른바 갑질(?) 횡포가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나훈아를 둘러싼 또 다른 에피소드. 1972년 12월2일 당시 시민회관에서 그해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이 열렸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이날 나훈아가 펑크를 냈다. 이를 빌미로 MBC는 나훈아의 MBC 방송출연 금지령을 내렸다.

연말 큰 잔치에 초대했는데 오지 않은데 대한 일종의 보복성(?)이었다. 그러나 이 금지령은 오래 가지 못했다. 3개월 후인 1973년 3월 25일자 ‘선데이서울’(232호)에는 “정상을 참작해 나훈아의 출연금지령을 해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떤 정상을 참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 금지령은 처음부터 오래 갈 수 없는 것이었다. 톱가수 나훈아를 빼놓고 MBC가 과연 얼마나 음악방송을 할 수 있었을까. 물어보나 마나였다.

여기에서 잠깐, 두 사람의 영화 출연 이야기이다. 인터넷에서 두 사람의 출연 영화를 쉽게 검색할 수 있다.

먼저 남진은 1967년 영화 ‘형수’(이 영화의 주제곡은 ‘우수’이다)를 첫 작품으로 ‘그대 변치 마오’, ‘언제나 님과 함께’, ‘그리움은 가슴마다’, ‘울려고 내가 왔나’ 등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이 무렵에는 자신의 히트곡을 제목으로 만든 영화에 자신이 출연한 경우가 많았다.

남진은 어느 인터뷰에서 62편에 출연했다고 했는데 남진이 출연한 영화 테이프와 포스터 등을 수집해온 한 여성 팬은 72편이라 했다. 62편이든 72편이든 엄청난 기록이다.

나훈아도 ‘풋사랑’, ‘고향을 묻지마라’,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삼일밤 삼일낮’ 등 적지 않은 영화에 출연했다.

최고의 흥행 가수이자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을 함께 끌어들인 영화도 여러 편 제작되었다. ‘어머님 생전’, ‘기러기 남매’, ‘친구’ 등에 남진과 나훈아가 함께 출연했다. 제1라운드 노래 경쟁에 이어 제2라운드 연기 경쟁을 펼쳤던 셈이다.

당시 가수로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고 있을 때였으니 그 인기를 노린 영화계의 유혹(?)도 많았을 것이다. 또 두 사람은 만능 연예인이 되고 싶은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인협회가 남진 나훈아 두 사람에게 내린 제명 결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다음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자유기고가 로마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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