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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 땀으로 일군 젊음의 꿈을 과연 누가 빼앗았는가. 찬란한 영광으로 꽃피웠어야 할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버린 그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왕따주행’ 논란의 당사자인 김보름과 노선영이 수년간 벌인 소송전에서 재판부가 작심하고 던진 변론이 의미심장하다. “어른들이 어린 선수들을 이렇게 가혹하게 지옥에 몰아내도 되는지 우리 사회에 묻고 싶다.”

서울고법 민사13부(재판장 강민구)는 지난 11일 김보름이 노선영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조정기일을 열고 ‘조정을 갈음하는 결정(강제조정)’을 내렸다. 법의 잣대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재판부는 양측의 화해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강제조정을 결정했다. 2주안에 이의 제기가 없으면 강제조정은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을 갖게 되지만 아마도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조정은 결렬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재판부는 변론에서 밝혔듯이 이 사태는 어린 선수가 아닌 배후에 숨어 버린 어른들에게 본질적인 책임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이 사건이 세월의 흐름에 지워지거나 묻히지 않고 법에 의해 시시비비를 가리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한 개인이 스스로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수준의 충격과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때론 오해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잘못된 정보나 의도된 선동으로 쏟아진 비난이 도를 넘게 되면 버티기 힘든 정신적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른바 ‘마음의 총상’으로도 일컬어지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도 있는 무서운 상처로 남게 된다.

‘국민의 욕받이’였던 김보름은 시간이 지나면서 불쌍한 피해자로 판명나는 모양새다. 가해자를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그는 논리적으로도 납득하기 힘든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돼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을 향한 군중의 부정적 감정이 정교하게 짜맞춘 얼개에 따라 동원됐고, 날선 비난여론은 광포한 ‘쓰나미’로 몸집을 키워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킨 뒤 한 개인을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객관성과 평정심을 유지해야할 매스컴이 선동에 가까운 판단으로 사태를 키운 것이나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진 국민청원은 김보름이라는 나약한 여자선수를 인격살인으로까지 내몰았다는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당시 김보름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닷새 뒤 열리는 매스스타트 출전을 포기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한 선수가 올림픽에 나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컨디션이 생명인 선수가 올림픽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뛰었다는 사실은 내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부끄러운 일이다. “4년의 꿈을 날려버릴 수 없지 않느냐”며 어르고 달랜 한 지도자의 간곡한 설득에 김보름이 스타트 라인에 섰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알고나 있는지…. 금메달 영순위였던 김보름이 그런 몸상태로 은메달을 따낸 건 기적과도 같다. 아니,기적이라기 보다는 참사였다. 확실한 금메달을 인격살인에 가까운 광포한 군중들의 비난여론으로 은메달에 머물게 했으니, 그건 가슴이 찢어지는 비극이라고 하는 게 맞다.

재판부가 말했듯이 이 사건을 만들고 키운 주범은 다름 아닌 얼음판의 어른들이다. 얼음판의 갈등과 싸움이 진실과 정의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제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별로 없다. 축적된 정보와 합리적 의심이 본질을 뒤덮었던 허위와 왜곡의 편린을 하나 둘씩 걷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진실과 정의의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정교한 위장막 속에 숨어 있는 건 위선과 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빙상계가 악을 선으로 위장하는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보편적 가치와 객관성을 생명처럼 여겨야 할 매스컴마저 빙상의 특정세력과 손을 잡고 진영논리에 가담하고 있다는 게 더 충격이다. 또 하나,이 판을 더욱 어지럽히고 있는 결정적 이유가 있다. 바로 특정 정치세력이 빙상문제에 조직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편견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빙상의 특정세력이 정치와 손을 잡게 되면 무서운 괴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대장동 사건에 빙상세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정치와 이권을 주고 받았는지, 과연 이러한 충격적인 사실이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지 국민들은 무척 의아할 게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건에 빙상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대장동 사건의 수사가 급물살을 타면 자연스레 알려질 것이라는 게 필자의 확신이다. 최근 성남시청 빙상 지도자 선임 문제가 체육계의 화제가 된 것도 이러한 흐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특정단체가 성명서를 내면서까지 두 명의 후보들을 맹공격하고 있는 이유는 석연치 않다. ‘왕따주행’의 재판부가 빙상계에 던진 죽비 같은 변론은 여러모로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김보름을 수렁에 빠뜨린 실체적 세력을 규명하는 게 앞으로 빙상계의 남은 숙제가 아닐까 싶다.

국민들도 더 이상 얼음판의 장난에 속아 넘어가서는 곤란하다. 정치세력까지 끌어들인 그들은 정치라는 발판으로 확보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통해 편견과 확증편향을 강화했다. 그들은 혐오와 증오에 중독된 대중들의 심리를 거짓 정보를 통해 조작하는 선동가로 전락했다.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오만함은 정치를 등에 업은 결과였다. 다른 종목들이 부러워하는 삼성을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사에서 쫓아낸 것도 선동의 못된 위력을 알아챈 그들의 작품이다.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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