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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 또 흥국생명이다. 프로배구판에 상식 밖의 일이 터지면 십중팔구 흥국생명과 관련된 사건이니까 이런 말이 나도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페넌트레이스 2위를 달리고 있는 감독을, 그것도 지휘봉을 쥐어준 뒤 18경기만에 경질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고, 지난 2일 경질의 매서운 칼날을 온몸으로 맞은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권순찬(48)감독의 황당함이란….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겠다.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흥국생명 구단이 밝힌 경질 이유는 이렇게 간단했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고 했다. 하물며 가장 합리적이고 투명해야할 기업의 인사가 조직원은 물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납득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반발을 사는 결정이라면 그건 ‘참사’다. 프로배구단 흥국생명이 팬들에게 감동을 줘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반발과 빈축을 사는 일을 되풀이할까. 비슷한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건 견제받지 않는 동일한 결정권자가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그 결정권자가 누구라는 건 이제 웬만한 배구팬이라면 다 안다.

이번 일도 결국 그의 무리한 간섭이 볼러온 태풍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추측이다. 감독의 고유권한인 선수기용에 대한 윗선의 개입과 간섭이 아무래도 이번 경질 사태의 본질일 것이라는 분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파장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관심이 지나치면 간섭이 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 프로구단을 소유하더라도 간과해서는 안되는 건 프로 스포츠구단의 공공재적 성격이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관심이 병이 된 오너가 팀을 자칫 자신의 소유물처럼 사유화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실질적인 주인인 팬들이 퍼붓는 십자포화를 견뎌낼 수 있는 오너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몰염치와 비상식으로 쓴 흥국생명의 ‘흑역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프로배구판을 쑥대밭으로 만든 지난 2021년 ‘쌍둥이’ 이재영-이다영 선수 파동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두 선수와 김연경과의 갈등에서 촉발된 이 사건은 이후 학폭이라는 더 큰 사태로 몸집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주판알을 튕긴 구단의 적절치 않은 스탠스가 팬들의 상식의 뇌관을 건드려 공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러나 이쯤은 약과다. 흥국생명은 지난 2012~2014년 2년에 걸쳐 김연경의 해외 이적과 관련해 숱한 잡음을 남기며 한국 스포츠계를 어지럽혔다. 김연경 이적 문제는 급기야 국정감사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무시한 구단의 근시안적 태도가 초래한 결과는 참담했다. 프랜차이즈 스타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긴 것은 물론 한국 프로스포츠의 후진성을 대외적으로 알린 불편한 역사는 수치스럽기 짝이 없다.

감독을 장기판의 졸(卒)처럼 우습게 여긴 사례는 부지기수다. 프로 원년인 2005년 이후 흥국생명 지휘봉을 쥔 10명의 감독 중 7명이 시즌 중 낙마한 사실은 기억의 창고에서 더이상 꺼내기도 싫다. 고(故) 황현주 감독은 경질의 칼을 두 번이나 맞은 비운의 사령탑이다. 2006년 2월 해임당한 그는 후임자 김철용 감독이 2006~2007시즌 도중 물러나자 지휘봉을 넘겨받았지만 2009년 9월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경질의 칼을 또 다시 맞았다. 황 감독은 한 팀에서 두 번이나 낙마한 흔치않은 경험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흥국생명은 2008~2009시즌 무려 3명의 사령탑이 지휘봉을 쥐는 한국 프로배구 사상 초유의 사태를 연출하기도 했다. 선수들은 황현주~이승현~어창선 등 세 명의 사령탑이 지휘봉을 쥐는 통에 아마도 머리가 핑핑 돌았을 게다.

감독 교체 후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사실상 구단은 경질의 칼날을 휘둘렀지만 잔여연봉 지급 문제로 티격태격했다. 감독이 스스로 사표를 냈으면 구단은 잔여연봉의 지급 의무가 없지만 경질을 했다면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에 연봉을 지급해야 하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흥국생명은 이런 저런 이유를 핑계로 사실상 경질된 감독들과 연봉지급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거나 그룹이 운영하고 있는 세화여고 감독으로 파견하는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르며 프로배구 생태계를 교란했다.

흥국생명의 석연치 않은 경질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게 단장의 동반 퇴진이다. 이번에도 김여일 단장이 함께 물러난다고 공식 발표했다. 팬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비상식적 인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누끄러뜨리기 위해 쓰는 꼼수에 다름 아니다. 물러나는 건 프로배구단 단장이라는 직책일 뿐이다. 감독과 함께 동반 퇴진한다던 단장들 대부분은 그룹으로 복귀해 자리를 보전한다는 사실을 팬들은 과연 알고 있을까. 모든 걸 종합해 보면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막대한 권력을 지닌 그룹 상층부가 몰상식한 감독 경질의 진원지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는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흥국생명에게 염치(廉恥)를 가르쳐주고 싶지만 이를 느끼기엔 그들의 얼굴이 너무 두꺼운 것 같다. 오너 리스크는 기업가치와 직결된다. 오너 리스크가 마지노선을 넘으면 기업은 자칫 위기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다. 팬을 기만한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감독 경질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린 흥국생명이다.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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