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로
시애틀에서 은퇴한 스즈키 이치로가 지난 3월 20일 도쿄돔에서 열린 2019 메이저리그 공식 개막전 오클랜드전을 앞두고 타격 연습하고 있다. 도쿄 | 김용일기자

[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지난 15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의 T모바일파크에서 작별 인사를 한 일본 야구 영웅 스즈키 이치로는 큰 여운을 남겼다.

지난 3월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개막 시리즈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이치로가 오랜 시간 몸담은 시애틀 구단 관계자와 동료, 팬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도쿄돔에서 은퇴 발표할 때 눈물을 보인 기구치 유세이와 디 고든에게 “오늘은 울지 마라”는 장난섞인 말로 입을 연 그는 “스물일곱이던 2001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몸집도 작고 무명이었다. 여러분은 날 반겨줬고 다시 돌아왔을 때 환영해줬다”며 “매일 도전했고 극복했고 열정을 품었다. 시애틀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진심이 담긴 한마디, 한마디를 꺼내 커다란 감동을 안겼는데 더욱더 큰 인상을 남긴 건 그간 통역을 대동했던 것과 다르게 5분 동안 준비해온 영어 연설문을 낭독한 것이다. 시애틀 관중은 저절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치로의 영어 연설은 단순히 영어를 쓰지 않았던 스타 플레이어가 영어를 사용한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 ‘스포츠호치’에 따르면 이치로는 이례적으로 모든 작문을 스스로 하면서 연설문을 완성했다. 그러면서 “언어는 다르지만 (마지막 자리에서) 마음은 꼭 전하고 싶었다.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색한 면도 있지만 계속 다듬고 연습했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비영어권 국가에서는 각 종목 프로 선수가 영어권 해외리그에서 진출했을 때 언어 사용을 두고 여러 견해가 상충한다. 혹자는 영어권 리그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하면 당연히 영어를 익히는 데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경기력과 상품성을 인정받고 해외에 진출한만큼 설령 영어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면 크게 문제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오히려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모국어를 사용하면서 통역을 대동하는 게 낫다는 얘기도 나온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활동하는 박성현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가 오랜 기간 인터뷰 때 통역을 대동한 것을 두고 국내에서는 “아직도 영어를 사용하지 않느냐”는 비판론과 “운동 선수가 실력이 우선이지 영어를 못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라는 옹호론이 맞섰다. 전 세계적으로 ‘영어 사용’을 두고 논란을 빚은 건 11년 전 LPGA가 영어 사용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고려했을 때다. 영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대회 출전 자격을 막는 규정이었는데, 비영어권 국가 선수들이 “모욕적이고 자멸적인 행위”라고 입을 모으면서 일단락됐다. 당시 LPGA 측은 스폰서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는데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프로 종목의 한 리그로 경쟁하는 장인데 ‘비즈니스화’를 앞세워 영어 사용을 강제하는 건 합당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이같은 갑론을박 속에서 이치로의 영어 연설은 종목별로 해외리그에서 뛰는 선수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로 선수의 연봉이나 상품성은 결코 경기력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를 뒷받침하는 동료와 구단,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팬을 기반으로 한다. 그라운드에서 보이는 수치를 떠나 그밖에서 진심으로 소통하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 역시 중요한 역할이다. 국내에서는 해외파 1세대 격인 박찬호를 비롯해 여러 스타플레이어 출신들이 이런 의미를 잘 새기고 후배들에게 전수한 케이스다. 메이저리그를 개척한 박찬호는 데뷔 초창기 마늘 냄새가 난다는 동료들의 편견 속에서 동양인의 한계를 깨고 경기장 밖에서 소통하고자 영어 단어와 문장을 하루 1개씩 외워 익혔다. 추신수나 류현진 등 현역 코리안 빅리거가 유창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것도 이같은 본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리그 경험 폭이 넓은 축구 선수들은 비교적 외국어를 익히는 데 가장 열린 자세를 갖춘 편이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인 손흥민(토트넘)은 독일어와 영어를 둘 다 능숙하게 구사한다. 10대 후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프로로 데뷔해 5시즌을 뛴 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로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언어를 익혔는데, 다른 선수보다 훈련 시간 외에 외국어 공부에 꽤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편이다. 종목적 특성도 꽤 반영됐다. 축구 선배이자 아버지인 손웅정 씨는 “축구는 다른 종목과 다르게 11명이 한 그라운드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저 경기 중에 ‘패스’, ‘슛’만 외치는 게 아니라 경기 전부터 원활하게 소통하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 언어를 익히는 건 기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손흥민_통신원
토트넘 손흥민이 2일 EPL 아스널과의 원정 경기를 마치고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 이동현통신원

영어는 아니지만 일본 J리그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성공적인 행보를 펼친 윤정환 감독은 원어민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한다. 그가 이례적으로 외국인으로 한 리그에서 선수, 지도자로 모두 성공한 건 일본인도 놀랄 정도의 섬세한 언어 표현 때문이었다. 전혀 이질감 없이 윤 감독을 받아들이면서 신뢰를 구축한 케이스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평소 선수, 구단 관계자와 일본어로 편하게 대화하나, 말 한마디를 조심해야 하는 기자회견 등 공식적인 자리엔 통역을 대동한 것이다. 진심 어린 소통에 주안점을 두면서도 단점을 최소화하는 언어 사용 방식으로 주목받았다. 어느 종목이든 나라별 리그 간격은 좁아지고 있고 글로벌화하고 있다. 제2 외국어 사용은 필수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찬반론을 떠나서 그 의미가 가치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행하는 게 중요한 시기가 됐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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