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윤소윤기자] 2004년 여름, 그리스 아테네 상공을 가른 박성현(36)의 화살은 과녁 정가운데에 명중했다. '퍼펙트 골드'. 카메라 렌즈마저 두 동강 내버린 가장 완벽한 '10점'이었다.


동계올림픽 효자종목에 '쇼트트랙'이 있다면 하계에는 '여자 양궁'이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2016년 리우올림픽까지 '단체전 8연패 석권'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 여자 양궁팀. 그 중심에는 '신궁' 박성현이 있었다. 언제나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선수들이지만, 당연한 금메달은 없었기에 화살이 선수들의 손을 떠날 때면 늘 짜릿한 긴장감이 전국을 뒤덮었다.


그러나 박성현이 활을 잡을 때 만큼은 안심해도 좋았다. 김수녕의 뒤를 이어 여자 양궁의 전설이 된 박성현은 어느 덧 예쁜 세 딸의 엄마로, 전북도청 여자 양궁팀의 최연소 감독으로 양궁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현역 시절이 기억나나"라는 물음에 "사실 한참 전이라 민망하지만 소환해 봐야죠. 하하"라며 웃던 박성현은 15년 전 자신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로 되돌아간 듯 실감나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무더운 7월 여름 어느 날 전주 양궁장에서 들어본 그의 인생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눈앞에 저절로 그려지게 했다.


▲무명의 양궁선수, 아테네에서 꽃 피우다


유소년 시절부터 '신궁'의 길을 걸었을 것 같았던 박성현이지만, 그가 양궁으로 꽃을 피워내기 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양궁을 시작했는데 사실 스무 살 때까지 무명이었어요. 초중고 때는 도내 시합만 나가도 하위권이었으니까."


활을 처음 잡았던 열 한살 때부터 실업팀에 입단하기 전까지는 그리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자신의 고향인 전북에서 수없이 많은 화살을 쏘아올렸고, 졸업 이후 전북도청 실업팀에 입단하며 드디어 노력의 결실을 볼 기회를 얻게 됐다.


"2001년 세계선수권에서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동메달을 따면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2008년도까지 쭉 국가대표를 했네요." 2004년, 스물셋의 박성현은 태극기를 가슴에 달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팀의 주장이자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선배들의 금빛 행진을 이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와 함께 아테네행 비행기에 올랐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박성현의 개인전 결승 상대는 동료이자 동생이었던 이성진이었다. 개인의 명예가 걸린 경기였기에 엄청난 긴장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박성현에겐 그리 큰 부담이 아니었다. "사실 그때는 개인전에 대한 욕심보다 단체전에 대한 욕심이 컸어요. 그래서 개인전 때는 우리나라 선수랑 같이 올라서 안도했죠.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메달이 나오는 거니까."


부담 없이 오른 결승전 경기, 박성현은 3엔드까지 이성진에게 밀리며 개인전 금메달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내려놨다. 경기 막판이었기에, 또 그에게는 단체전 금메달이라는 더 큰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큰 욕심은 오히려 독이 될 것이라 생각한 터였다. 그러나 이성진이 마지막 엔드에 실수를 범하며 기회는 박성현에게 돌아갔다.


"사실 막판까지 지고 있으니까 '내가 이렇게 해서 뭐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하. 그냥 단체전이나 잘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쐈는데, 마음을 비워서 그런지 잘 맞았어요. 운이 좋아서 메달을 땄죠!"


박성현이 단체전에 더 큰 부담을 느낀 이유는 '주장의 무게' 때문이었다. 인생 처음으로 출전한 올림픽에서 '주장'의 책임감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메달을 따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만, 제가 주장이기 때문에 팀원을 다독여야 한다는 부분도 부담이었어요."


8월 20일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는 숙명의 라이벌 중국과 대한민국의 단체전 결승전이 진행됐다. 두 팀은 박빙의 승부를 펼치며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치열한 경쟁을 계속했다. 마지막 한 발로 금메달의 주인이 결정되는 순간, 활을 잡은 사람은 박성현이었다.


박성현의 손을 떠난 마지막 화살은 정확히 과녁 정중앙 10점에 명중했으며, 대한민국 대표팀은 서울올림픽 이후 5연속으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르게 됐다. 241-240. 1점 차이의 짜릿한 승부였다.


▲통한의 베이징 올림픽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선수 풀이 넓은 양궁 종목의 특성상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무대보다 더 어려운 경기는 국내 경기와 국가대표 선발전이었다. 이미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지금은 다른 나라 선수들의 실력도 상향 평준화가 됐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선수보다 기량이 아래인 선수들이 많았어요. 그런 선수들이랑 겨루는 것보다 국내 경기가 훨씬 어려웠죠. 올림픽 같은 경우는 자체평가전을 포함해서 10차까지 선발전을 치르니까요."


박성현은 치열한 국내 선발전을 뚫고 다시 한 번 올림픽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박성현에게 있어 '개인 통산 2관왕'과 '단체전 6연패'라는 막중한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무대였다.


그러나 중국의 홈그라운드는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장애물이자 약점이었다. 당시 대표팀은 단체전 6연패에 성공했으나, 박성현이 오른 개인전 결승에서는 은메달에 그치며 아쉬움을 안겼다. 빛나는 은메달이었다. 그러나 쿨하게 패배를 인정하기엔 결승전 당시 중국 응원단의 방해공작과 과한 응원 소리가 거슬릴 정도였던 터라 아쉬움은 배가 됐다.


"(중국 응원단의 방해를) 안 느꼈다면 거짓말이죠. 근데 그것 때문에 메달을 못 땄다고 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 또한 제가 이겨내야 하고 감내해야 하는 일이니까 탓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집중력이 없어서 졌다고 말은 했지만, 영향이 없던 건 아니었죠."


그러나 당시를 떠올리며 얘기를 이어가던 박성현은 그때가 떠오르는 듯 주먹을 꽉 쥐며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아 사실! 뛰어 올라가고 싶었죠!(웃음). 왜냐하면 국제대회 뛰어 보면 선수인지 응원단인지 다 알아요. 중국 선수들이 응원하러 온 게 보이더라고요. 근데 패자는 말이 없다고 하하. 그거에 대해 뭐라고 따지거나 얘기를 할 수는 없더라고요."


양궁 여제들은 개인전 패배에 흔들리지 않았다. 개인전 은메달의 한을 풀듯 박성현을 비롯한 대표팀은 단체전 결승전에서 과녁 정중앙에 화살을 꽂아넣으며, 중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테네랑 다른 부담감이었어요. 2004년에는 멋모르고 덤볐지만 2008년에는 해볼 건 다 해보고 알 거 다 아는 나이에 나갔잖아요. 부와 영예가 뭔지도 알고(웃음). 주현정 선수가 저랑 동갑이다 보니, 내가 끌고 가지 않아도 맞춰줄 선수가 있어서 부담이 덜 했던 것 같아요."


여러 역경을 이겨내고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박성현은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을 마무리했다.


▲최연소 지도자의 길, 밑바닥부터 시작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끝으로 박성현은 국가대표 자리를 후배들에게 넘겨주게 됐다. 올림픽 직후인 2009년부터는 전북도청의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며 선수와 지도자의 길을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양궁은 사실 아이를 낳고도 자기관리를 잘하면 충분히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선수로도 충분히 활동할 수 있죠.”


다른 스포츠에 비해 나이와 체력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스포츠임에도 박성현이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당시 전북도청의 감독을 맡고 있던 서오석 감독(현 코오롱 남자감독)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때 코오롱 팀이 창단되면서 감독님이 그 팀으로 가게 되셨어요. 이적을 결정하신 후에 저를 부르셔서 ‘이 팀(전북도청)의 지도자를 네가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갑작스러웠죠.”


언제고 내려놓아야 하는 활이었지만, 현역 선수로서의 역량이 충분했던 당시의 박성현에게 ‘지도자’ 제안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멘토와도 같았던 서 감독과의 이별 역시 박성현에겐 큰 짐으로 다가왔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있었는데 그런 제안을 하시니까 저 그때 엄청 울었어요. 제가 스무 살 때부터 그 자리까지 가게 해주신 분인데. ‘나를 버리고 가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근데 감독님도 팀을 위해 가시니까, 제가 억지로 드러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박성현은 서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플레잉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첫 아이를 출산한 다음 해인 2012년, 박성현은 마침내 활을 내려놓고 자신의 양궁 인생을 함께 했던 전북도청 최연소 여자감독으로 부임한다. 선수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팀. 그 팀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박성현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엄청난 부담이었다.


“최연소 감독이고 게다가 여자 최초고. 선수 때 느꼈던 걸 그대로 하면 되겠지 했는데 정말 다르더라고요. 예전엔 내 할 일만 하면 됐는데, 감독은 선수 한 명 한 명을 파악해야 하고 팀 분위기도 읽어야 하고. 제가 생각했던 거랑 많은 것이 달라서 그 때 흰머리가 많이 생겼어요. 하하.”


2012년부터 이어진 전국체전에서 박성현이 이끄는 전북도청은 단 한 번도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선수로서 딸 수 있는 메달은 모두 목에 걸었으나, 지도자 박성현에겐 유독 메달 운이 따르지 않았다. “사실 현역 시절 메달리스트들이 지도자가 되면 지도력이 없다는 얘기가 많이 돌았어요. 저는 그런 걸 깨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당시의 박성현은 ‘감독’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팀을 이끌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최연소 여자 감독’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외부의 시선과 수많은 간섭 때문이었다. “제가 나이가 어리고, 처음 팀을 맡는 거다 보니까 선수 선발에 대해서 말이 많았죠. 좋게 말하면 조언, 나쁘게 말하면 간섭 이런 거요. 그땐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엔 변명했어요. 제가 제 팀을 마음대로 이끌지 못했던 게 성적 부진의 요인 중 하나라고.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선수를 제 스타일로 선발하고 이끌면서 점점 나아졌어요. ‘박성현식’으로 방향을 바꿔가면서 ‘성적’ 얘기가 쏙 들어갔죠. 나이가 어린 지도자, 여자 지도자 그런 편견도 사라졌어요.”


▲'신궁(神弓)'의 꿈, 또 다른 '신궁(新弓)'을 만들고 싶다.


6년간의 긴 기다림 끝에 박성현이 이끄는 전북도청 여자팀은 2018년 전국체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슛오프(양궁 경기에서 동점으로 끝났을 때, 우승팀을 가리기 위해 추가로 활을 쏘는 것)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얻은 값진 금메달이었다.


“그동안 묵힌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하하. 되게 박진감 있었고. 극적으로 이겨서 감동이 배로 왔던 것 같아요. 감독으로서 낸 최고 성적인데 올해도 그렇게 해서 그런 감동이 다시 왔으면 좋겠네요.”


선수 때는 냉철한 눈빛으로 과녁 정중앙에 화살을 꽂아넣었던 그였지만, 지도자이자 선배 박성현은 조금 달랐다. 2012년 런던올림픽 때는 관중석에서 그 긴장감을 함께 하며 선수들의 부담을 나눠 가졌다. “제가 잘 안 우는데 애 낳고 달라졌어요. 셋을 낳으니까 오락가락하고 감정 기복이 심해졌어. 하하. 그래서 리우올림픽 때 후배들이 금메달을 땄을 땐 눈물이 나더라니까요. (웃음)”


감정 기복의 아이콘이 된 박성현의 화살은 이제 또 다른 목표를 조준하고 있다. 자신의 뒤를 이을 뛰어난 후배들을 양성하는 것이 가장 큰 꿈이다. “지금 당장의 목표는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언젠가는 국가대표 지도자가 되기 위한 도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합니다.”


“제가 운동을 하면서 학위를 위한 공부를 같이했었어요. 그때는 ‘이걸 왜 하고 있나, 돈 낭비 시간 낭비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학위 마친 것에 대해 너무 감사해요. 이제는 공부에 대한 갈증이 생기더라고요. 올림픽 나가는 선수를 만들고, 좋은 지도자가 되고. 이 모든 걸 공부를 하면서 병행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요.”


학업에 대한 열정은 단순히 박성현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걷는 모든 길은 ‘양궁’으로 향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올림픽 위원도 될 수 있는 거고, 대한양궁협회가 서포트를 많이 해주시잖아요. 그런 지원이 없었다면 8연패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 쪽에서 서포트를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물론 첫번째 목표는 우리 아이들이 잘 크는 거고요. 하하.”


'엑스텐(X-10)’. 양궁에서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정확히 명중시킨 것을 뜻하는 용어다. 정중앙의 중심에 명중해야 하는 엄청난 일을 대한민국의 박성현은 올림픽이라는 무대에서 성공하며, 렌즈마저 깨트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양궁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박성현의 수많은 기록은 이제 양궁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겨졌다. 그러나 그의 양궁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뒤를 이어 ‘엑스텐’을 명중시킬 또 다른 신궁의 탄생을 위해, 박성현은 오늘도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younwy@sportsseoul.com


사진 | 윤소윤기자 younwy@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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