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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록밴드 ‘해리빅버튼’은 국내에선 보기 드물게 강렬한 하드록 사운드를 추구하는 팀이다. 앨범을 낼 때마다 평단의 호평을 받을 정도로 좋은 결과물을 낸다.

이팀의 리더이자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인 이성수의 이력을 보면 여러모로 독특하다. 90년대 한국 최고의 메탈 밴드인 크래쉬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99년 영국으로 건너가 방송 그래픽 디자이너로 이력을 쌓았고, 2000년대 초반엔 국내로 돌아와 IT벤처기업 기획이사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음악을 하기 위해 2009년 무렵 일을 그만둔 뒤엔 오직 음악에만 몰두하고 있다. “음악을 시작한 뒤로 음악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나는 음악과 함께 살아간다. 앞으로도 음악인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현재 해리빅버튼은 러시아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해리빅버튼’을 소개해 달라.

빈티지모던 사운드를 추구하는 하드록 밴드라고 스스로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60~70년대 감성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에서 ‘빈티지’, 90년대 모던한 사운드까지 다채로운 요소를 넣는다는 의미에서 ‘모던’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특정 시대의 음악에 머물지 않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좋은 것을 이어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주로 3인조로 활동했지만 현재는 보컬 겸 기타를 맡고 있는 이성수 ‘원맨팀’이다. 본인을 소개해 달라.

나이는 공개하지 않겠다. 록커는 나이가 없다.(웃음) 9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밴드 크래쉬에서 활동했다. 90년대말엔 스푼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1년~1년반 정도 활동했다. 스푼은 활동 당시엔 국내 최고의 하드코어 밴드라는 평가를 받았다. 두 팀에선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2010년말 밴드 ‘해리빅버튼’을 결성하기 전까지 경력에 공백기가 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영국에 있었다. 사운드를 순수 예술로 접근하는 ‘소닉아트’라는 학문을 공부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방송국에 들어가게 됐다. 케이블TV와 온라인에 스포츠 관련 콘텐츠를 제작·공급하는 회사였다. 거기서 방송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2003년 한국에 왜 돌아왔나.

영국에 가기 전 기르던 고양이가 있었다. 당시 한국과 영국 사이 협약이 없어서 고양이를 영국에 데려갈 수 없었다. 지인, 친구들이 맡아 길러줬는데 어느날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고양이가 없어졌다는 거였다. 고양이를 찾으러 한국에 돌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나라였다면 ‘미쳤냐’는 말을 들었을 텐데 영국에선 그러지 않더라. 당시 회사에선 나를 아트디렉터로 승진시키려는 상황이었다. 고양이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니까 ‘미쳤냐’고 하는 대신 걱정 하더라.

그때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고양이, 상심한 사람을 걱정해주는게 그들에겐 우선이었다. 그게 정상적인 게 아닌가 싶더라. 한국에 돌아와서 벽보도 붙이고, 몇년간 돌아다녀 봤지만 결국 고양이를 찾진 못했다.

-한국에 들어와선 뭘 했나.

돌아와서 밴드를 만들려고 했는데 나와 동시대 음악을 한 동료, 후배들이 음악씬에 남아있지 않았다. 대부분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음악을 시작할지 고민하고 수소문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해리빅버튼’을 결성하고 합주를 할 때까지 7년이 소요됐다.

그 기간 동안 IT 벤쳐회사에서 일했다. 기획이사로 재직하며 아트디렉팅 일도 했다. 회사에서 기획한 일이 잘돼 미국에서 열린 테크크런치 행사에서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한 기억도 있다. 그 장면이 일본 아사히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웃음)

회사는 2008~2009년 무렵 그만 뒀다. 자꾸 몸이 아팠다. 생활을 유지 위해 한국에서 일했는데 음악과 병행 하지 못하고 일만 하니까 어느 순간 시름시름 앓게 됐다. 병원에서 원인을 정확하게 모른다고 했다. 어느 순간 ‘왠지 이게 끝일 거 같다’는 두려움이 오더라.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음악인인데, 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갈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죽는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때 곡이라도 남겨야겠다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곡을 쓰고. 밴드를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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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디렉터로, IT 벤처 업체 기획 이사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는데 그걸 포기하고 음악을 선택한 게 신기하다.

음악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경제적인 이유로 회사를 다녔는데 두마리 토끼를 잡기 쉽지 않더라. 어떤 걸 포기하겠냐 고민했을 때 음악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음악을 시작한 뒤로 음악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나는 음악과 함께 살아간다. 앞으로도 음악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다른 모습의 나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건 확고하다기 보다 자연스럽다.

록을 왜 좋아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다른 장르 음악도 좋아하지만 록 만큼 내 가슴을 뛰게하는 음악은 아직 없었다. 그래서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 같다.

-해리빅버튼은 2012년 1집 발매 이후부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어떤 밴드라고 생각하나.

나는 해리빅버튼이 독보적인 밴드라고 자부한다. 다른 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음악은 국내 음악씬에 없었던 종류의 록이라고 생각한다.

유튜브에 올린 뮤직비디오를 본 해외 팬의 댓글 중 인상적인 게 있었다. ‘미국 록음악의 전성기 때 음악을 듣는거 같다’는 표현이었다. 뿌듯했다.

-밴드 결성 후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나.

2012년 10월 말 1집 앨범을 냈는데, 이틀 뒤 택시를 타고 가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경추골절, 다중골절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전신 마비를 각오하라. 앞으로 기타는 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데뷔 앨범이 나오자마자 끝인가 싶었다. 큰 좌절을 겪었다. 병원에서 2~3개월 누워있다가 우울증이 너무 심해져 집에서 요양을 했다. 그래도 집에 있으면 최소한 기타를 볼 수는 있지 않나. 기타가 내 눈 앞에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사고난 뒤 6~7개월 후 의사 몰래 첫 공연을 했다. 뼈가 붙지도 않았는데 이틀짜리 공연을 했다. 며칠 후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왜 뼈가 안붙는지 모르겠다고 의사가 당황해 하더라.(웃음)

monami153@sportsseoul.com

사진 | 해리빅버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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