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박준범기자] 늙은 소나무라는 뜻의 노송(老松).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항상 자신의 자리에 머물던 김용수에게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하지만 노송도 '시간'이라는 장벽은 거스르지 못했고, 마운드를 떠났다. 은퇴 후 코치로 LG 유니폼을 입었지만 2010년 이후 더는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김용수를 볼 수 없었다.


2015년 LG가 아닌 롯데 코치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앞서 중앙대 감독 시절 받은 징계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그는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대학 강의와 재능기부로 야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오고 있다.


◇ 후회 남긴 '3년 자격 정지' 중징계


김용수는 2010년 5월, LG 스카우트 코치에서 모교인 중앙대 감독으로 부임한다. 정든 LG를 떠나 대학 감독을 선택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 그는 "사실 스카우트 코치도 상관없었다. 그때 마침 중앙대 감독 제의가 왔고, 정말 고민을 많이 했다. 유니폼 입고 현장에 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중앙대를 선택하게 됐다. 지금 돌아보면 후회가 되는 부분이다"라고 회상했다.


그가 말한 '후회'는 감독을 맡은 결정 자체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감독 시절 심판에게 100만 원을 건네 '3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은 것에 대한 후회도 들어있는 듯했다. 결국 그는 2014년 12월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지만, 이때의 징계로 발표 다음 날 계약이 철회되는 아픔도 겪었다. "(돈을) 안 주는 게 제일 좋은데 주위에서 자꾸 권유했다.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고, 결국 돈을 건넨 내가 바보다"라며 자책했다.


롯데와의 계약에 대해선 "징계 중이었기 때문에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마추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결국 잘 안 풀렸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아마추어에서 받은 징계가 프로와 연계되지는 않지만, 당시 여론이 좋지 않던 롯데는 계약을 철회했고 프로 복귀는 그렇게 멀어졌다. 그는 "지금은 많이 내려놨다.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없고, 운동장에 있으면 즐겁겠지만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군 면제 혜택→MBC 청룡 입단


선수 시절 김용수의 족적은 대단했다. 동대문중학교-동대문상고-중앙대학교를 졸업한 김용수는 프로가 아닌 실업팀 한일은행을 선택했다. 당시 MBC 청룡(現 LG트윈스)이 그를 지명했지만, 김용수가 거부했다. 그는 "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군 문제는 의외의 지점에서 해결됐다. 1983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게 됐고, 한국이 대만, 일본과 함께 공동 우승을 차지하며 군 면제 혜택을 받았다. 군 문제를 해결한 김용수는 1985년 MBC 청룡에 입단한다. 데뷔 첫해 그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전반기엔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후반기 6경기에 출전해 1승을 거두고 시즌을 마감한다.


하지만 프로 두 번째 시즌이던 1986년 그는 구원왕에 오르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1년 만에 달라진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당시 새로 부임한 고(故) 김동엽 감독이 시즌을 앞두고 합숙 훈련을 발표했다. 합숙이 싫은 마음에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던 중에 맹장이 터져 푹 쉬었다. 그때 연습을 더 했으면 성적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프로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그는 그야말로 '전천후'였다. 그에게 보직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보통 6회부터 출전을 하는데 연장전을 가면 내가 다 책임졌다. 6회부터 7이닝을 던져 본 적도 있다. 어떻게 보면 그랬기 때문에 마무리와 선발을 오갈 수 있었다. 투수층이 얇았던 MBC 청룡의 사정이 나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고 회상했다.


◇ 부상 극복·분업화…기억에 남는 1994년 우승


아직도 많은 LG 팬들이 김용수를 떠올리는 이유 중 하나는 LG가 기록한 두 번의 우승에 김용수가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LG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1990년, 1994년 한국시리즈 MVP도 그의 몫이었다. 1990년에는 전반기엔 마무리로 후반기에는 선발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는 33경기에 출전해 12승 5패 5세이브를 기록했고,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도 2경기에 출전해 2승을 올리며 LG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여기엔 새롭게 장착한 스플리터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86년에 주니치에서 온 미즈다니 코치가 스플리터 던지는 요령을 알려줬는데 그때는 안 던졌다. 그러다 1990년에 선발로 보직이 바뀌면서 스플리터를 던지게 됐다"면서 "실전에서 처음 던졌는데 타자들이 속수무책이었다. 손가락 관절을 벌리기 위해 잘 때 스플리터 그립을 잡은 채로 잤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첫 우승의 기억보다 마무리로 나서 일군 1994년 우승의 기억이 더 강렬했다. 1994년 당시 우승을 확정 짓는 땅볼을 잡고 손을 번쩍 들며 기뻐하는 모습은 아직도 회자된다. 그는 "1992년 부상(좌골신경통)을 당해 한동안 경기를 못 나갔는데 이광환 감독이 1이닝 마무리 체제를 결정하면서 무리 없이 마무리를 맡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이 감독에 대한 고마움도 전했다.


또 우승 세리머니에 대한 비화도 공개했다. 김용수는 "9회 마지막 타자가 들어설 때 포수인 (김) 동수(現 LG스카우트 총괄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와서 '마지막 타자가 아웃되고 나서 마운드에서 손들고 있으면 뛰어가겠다'라고 했다. 동수 말대로 했는데 카메라에 내 얼굴만 안 보였다"고 웃었다.


◇ 전천후 활약의 훈장 '100승 200세이브'


LG의 두 번째 우승 이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다. 1996년 다시 선발로 전환한 김용수는 16승을 거뒀고, 1998년에는 38세의 나이로 18승을 거둬 최고령 다승왕에 올랐다. 1999년 4월 15일 현대전에서는 200세이브를 올려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로 '100승 200세이브'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뿐만 아니라 투수 최초 500경기 출전, 최고령 다승왕 등 숱한 기록을 달성했다. 이에 대해 "기록은 깨지게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선발이나 마무리 둘 중 하나만 계속했으면 아마 그 기록은 아무도 깨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 '100승 200세이브'라는 기록은 나에게 아픈 손가락이다"고 진심을 전했다.


김용수는 만 41세까지 현역생활을 이어갔다. 은퇴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2~3년은 더 던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했다는 얘기다. 김용수는 "자기관리는 스스로 해야 한다. 본인 몸은 자신이 제일 잘 안다. 유니폼 입었을 때만큼은 혼신을 다해서 내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김용수에게도 은퇴의 시간은 다가왔다. 하지만 은퇴는 그의 온전한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더 던질 수 있었으니까 은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은퇴 소식도 기사로 먼저 접했다. 당시 이광은 감독이 '후배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고 고백했다. 은퇴 번복에 대해선 "은퇴 기사가 나왔는데 번복을 하게 되면 LG에서 이룬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해서 은퇴를 받아들였다"고 속마음을 전했다.


200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 김용수는 곧장 연수를 떠났고, 2002년 LG 코치로 복귀한다. 하지만 '16년 LG맨'의 코치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재활 코치를 시작으로 2군 코치, 1군 코치에 이어 스카우트 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그는 "새 감독이 오면 코치들이 바뀌기 마련이다. 또 내가 LG에 대한 색깔이 너무 강하다 보니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 'LG'였기에 가능했던 선수 김용수의 업적


김용수는 여자야구대표팀과 포철고등학교 인스트럭터를 맡은 데 이어 서울대학교 교양 수업 강의를 통해 가르침의 끈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프로로 복귀에 대해선 "지도자를 하고 싶은 마음은 크다"면서도 "이제는 끝났다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감독들의 나이가 젊어지다 보니까 그 세대들을 포용하는 것 같다. 10년만 젊었어도"라고 말했다.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LG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도 전했다. 그는 "최근 LG 경기를 보면 안타까움이 있다. 젊은 선수들 위주라서 그런지 그라운드에 리더가 없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두산의 성적이 좋은 이유는 선수들끼리 팀플레이를 하기 때문"이라고 평하며 "LG는 개인플레이가 강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LG 출신 코치가 많이 없다. 팀 출신 코치들이 아무래도 팀의 습성을 알기 때문에 팀을 잘 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LG를 향한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저도 LG에 기여를 많이 했지만 'LG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됐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저한테 많은 기회를 줬고 영구결번이 된 부분도 감사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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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 스포츠서울 DB, 박준범기자 beom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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