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재가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성 | 이용수기자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이운재(45). 그의 이름 석 자를 수식하는 말은 무수히 많지만 모두 한 의미를 뜻한다. 대한민국 대표 수문장부터 한국의 야신, 거미손까지 한국의 골문이 철벽으로 표현되는 수식어는 전부 그의 것이었다. 지난 1994년부터 2010년까지 16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빈 그는 선수 시절 98 프랑스월드컵을 제외한 월드컵 무대를 모두 밟았다. 이운재가 뛸 동안 축구 국가대표팀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성과를 이뤘고 많이 발전했다. 그는 한국의 골문을 지키며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에 다가서는데 공헌했다.


선수를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을 걷는 그는 이제 친정팀 수원 삼성에서 골키퍼 코치로 활약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2018 러시아월드컵 개막까지 딱 보름을 남겨둔 가운데 이운재가 관망하는 신태용 감독의 축구대표팀 그리고 그의 선수 시절 월드컵 경험을 들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94 미국월드컵 출전 전 이운재. (스포츠서울DB)


◇'거미손' 이운재의 월드컵 첫 기억, 94 미국 월드컵


누구나 처음의 기억은 생소하고 소중하다. 이운재의 첫 월드컵은 94 미국월드컵이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시골 촌뜨기가 상경하듯 월드컵의 신기한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운재는 "신기하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에스코트는 이렇게 하는구나. 경찰은 이렇게 붙는구나. 모든 게 신기했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게다가 첫 월드컵이자 '전차군단' 독일과 3차전 후반전에 교체 투입된 그는 남은 경기를 무실점으로 마무리했다. 주전 골키퍼였던 최인영이 전반전 3골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첫 16강 진출은 2002 한일월드컵보다 8년 빠른 94 미국월드컵에서 이뤄냈을지도 모른다. 이운재는 "내 생애 첫 월드컵에서 경기에 뛸 것을 상상도 못했다. 선수들과 월드컵에 함께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됐다"며 "당시 나는 정신 없이 경기를 치렀다"고 회상했다.


이운재가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성 | 이용수기자


◇이운재 기억속 감명깊은 2002 한일월드컵 경기는? 스페인 아닌 '폴란드전'


16년 전 서울광장부터 광화문까지 거리를 가득 채운 '붉은악마'의 함성을 기억하는가. 당시 한반도는 '대~한민국'을 크게 외치는 국민의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태극전사들이 경기를 거듭할 때마다 광장으로 모여드는 국민의 수는 증가했고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와 태극기를 휘날렸다.


그때를 회상하면 히딩크호가 치른 여러 경기 중 8강에서 스페인과 승부차기까지 접전을 펼친 경기는 빼놓을 수 없다. '거함' 스페인을 상대로 연장전까지 0-0 무승부로 비긴 건 기적과도 같았다. 승부차기는 한국이 스페인을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히딩크호의 수문장이었던 이운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기적의 순간을 만들었다. 그는 승부차기 네 번째 키커로 나선 호아킨 산체스의 공을 막으며 4강행 발판을 마련했다. 이를 한국의 마지막 키커이자 주장이었던 홍명보(現 대한축구협회 전무)가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이운재의 안정적인 선방 덕분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운재는 한국의 첫 상대였던 폴란드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그는 "첫 경기를 뛸 수 있었다는 자체가 좋았다. 첫 경기를 뛰지 못했다면 (내가)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전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경쟁과 시간 속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의)선택을 받았기에 소중하다"라며 "나를 선택한 것이 잘못된 결정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 첫 경기에 더 많은 노력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첫 경기 전까지 경주 캠프에서 훈련했는데 내가 놀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웬만한 슛을 모두 막았다. 5m 앞에서 찬 것도 막았을 정도다"라고 덧붙였다.


이운재가 스포츠서울과 인터뷰 중 열정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화성 | 이용수기자


◇이운재가 생각하는 승부차기란?


이운재는 뛰어난 '슈퍼 세이브'보다 안정감을 골키퍼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많은 선방쇼를 보인다고 해도 결국 골을 허용하면 인정받지 못하는 게 골키퍼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수시절 안정감을 높이기 위해 경기 중 목이 쉴 정도로 수비수들을 불러 외쳤다. 자신만의 확신이 이었기에 2002 한일월드컵 8강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결정적인 선방을 보여줄 수 있었다.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상대 공을 막아낸 골키퍼 이운재. (스포츠서울DB)


결정적인 선방은 이운재를 주목받게 했다. 그러나 그는 승부차기를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축구의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운재는 "골키퍼는 승부차기에서 돋보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무조건 상대 키커의 공을 막지 못한다. 욕심 때문이다. 욕심이 생기면 반응도 빨라진다. 상대 키커가 공을 차지도 않았는데 먼저 움직이면 골을 허용할 수 밖에 없다. 골키퍼는 항상 후자여야 한다. 선자가 될 수 없다"며 "꽃이 되고자 욕심낸다면 뚝 끊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운재가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상대 공을 막아내고 있다. (스포츠서울DB)


결국 승부차기는 기다리는 쪽이 승리하는 셈이다. 구조적으로 키커가 공을 차야 승부차기가 진행되기에 골키퍼에게 유리할 수 밖에 없다. 이운재는 "승부차기에서 책임은 키커에 있다. 내가 막지 못한다고 해도 비난의 화살은 실축한 키커로 향한다. 그렇기에 더 마음 졸이는 건 키커다"라며 "골키퍼가 없어도 구석으로 차기는 힘들다. 대다수는 (중앙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공이 날아온다. 그래서 방향을 보고 움직여도 막을 수 있다. 대신 기본적인 것을 못막았을 때는 책임을 골키퍼가 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페인전 승부차기 역시 그의 지론대로 성공한 경우다. 이운재는 "승부차기는 기술이 아닌 배포로 하는 것"이라며 "네 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가 중앙선에서 천천히 걸어올 때부터 승리를 확신했다. 내 움직임을 보고 차려고 하더라. 하지만 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공의 속도, 코스, 정확성 어느 하나 선택하지 못한 호아킨은 내게 막힐 수 밖에 없었다"며 웃었다.


◇국내 유일 센추리클럽 가입 골키퍼


이운재는 16년간 태극마크를 달고 총 138경기를 뛰었다. 90년대 유럽 프로팀과 상대한 경기, A매치로 인정되지 않은 경기를 제외하면 그의 공식 A매치 출전 기록은 133경기다. 2002 한일월드컵을 전후로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그는 히딩크 감독부터 움베르토 코엘류, 요하네스 본프레레,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감독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외국인 감독 체제에서 주전으로 생존했다.


이운재가 수장 교체 때마다 계속 신임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축구 철학 덕분이었다. 그는 "다양한 감독들의 축구 철학에 모두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받은 것"이라며 "경기에 뛰고 싶으면 감독 눈에 들어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축구는 지도자가 됐을 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이운재가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성 | 이용수기자


◇준비된 지도자였던 이운재, 첫걸음서 거둔 '금메달'


지난 2012년 전남 드래곤즈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이운재는 2014 인천아시안게임을 준비하던 故 이광종 감독의 부름을 받고 골키퍼 코치로 합류했다. 그의 지도자 행보 첫 걸음이었다. 이운재는 당시 지도했던 김승규와 노동건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대표 선수라면 기본적인 건 알기 때문에 사소한 건 얘기하지 않는다. 단지 방향을 제시할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그는 2016 리우올림픽에서도 신태용 감독의 옆을 보좌하며 8강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모든 게 선수들이 잘한 덕분"이라며 손사래를 친 이운재는 사실 현역 때부터 지도자를 착실히 준비했다. 꾸준히 준비한 내공이 지도력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는 "골키퍼 지도자 자격증은 1급까지 지난 2010년에 모두 땄다. 남들 겨울에 쉴 때 안쉬고 준비했다. 은퇴 후에는 필드 지도자 자격증을 A급까지 갖췄다"고 전했다. 선수 시절부터 계획대로 성실히 이행하고 있으며 국내에서 쉽게 딸 수 없는 P급 지도자 자격증까지 도전할 계획이다.


'거미손' 이운재가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화성 | 이용수기자


이운재가 지난 2008년 K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수원 삼성의 우승을 이끈 뒤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배우근기자 kenny@sportsseoul.com


◇이운재에게 수원 삼성이란?


지난 2011년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하며 수원을 떠난 이운재는 6년 만에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수원은 그에게 프로 데뷔한 팀이기도 했고 가장 좋은 기억을 함께한 친구였다. 지난 1996년 수원에 입단해 최고 전성기를 함께했다. 98년, 99년, 2004년, 2008년 등 수원의 유니폼에 별을 단 해에는 이운재가 있었다. 4번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기에 그에게 친정팀 복귀는 벅찰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오랜만에 돌아와서인지 되게 낯설었다. 다시 돌아왔다는 마음에 긴장했다"며 당시 벅찬 마음을 떠올렸다.


그의 현역 시절 가장 기억 남는 경기는 창단부터 지난 2003년까지 팀을 이끈 김호 감독의 고별전이었다. 그는 "홈에서 대구와 경기할 때였다. 후반전에 내 실수로 가랑이 사이로 실점했다. 결국 수원이 2-1로 역전승했지만 더 완벽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까지 남는다"고 아쉬워했다.


이운재가 지난 2004년 12월 독일과 친선전 당시 상대 페널티킥을 막아내고 있다. 이주상기자 rainbow@sportsseoul.com


◇이운재가 말하는 독일 대처법


신태용 감독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오는 6월 27일 F조 조별리그 3차전에서 독일을 상대한다. 모든 초점이 1차전 상대인 스웨덴에 맞춰져 있지만 16강을 노리기 위해선 독일을 잘 알아야 한다. 국내에서 월드컵 때 가장 많이 독일을 상대한 경험을 지닌 사람은 이운재다. 그는 94 미국월드컵, 2002 한일월드컵, 2004년 부산에서 치른 독일과 평가전까지 총 3차례 상대했다.


이운재는 "독일을 상대하는 팁은 잘 해야 한다는 것 밖에 없다.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선수 개개인이 부딪치기보다 팀으로 싸워야 독일을 괴롭힐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개개인으로 나선다면 엄청난 망신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장 현실적인 조언은 골키퍼로서의 조언이었다. 그는 "실수의 모습이 0.1%도 나와선 안 된다. 월드컵은 절대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실수는 즉 골인 셈이다"라면서 "잘하려 하지 말고 내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이 굴러오면 차고 간단한 것만 생각해야 한다"라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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