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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사진|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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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사진|이용수기자 purin@sportsseoul.com

세계 무대에서 한국 여자 골프가 인정받는 건 험난한 길을 밝히고 열어준 ‘선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황무지였던 미국 무대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주인공이 바로 박세리(40)다. 현역시절 스포츠의 감동으로 국민에게 많은 용기를 불어넣은 박세리는 25년간의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지난 2016년 은퇴한 뒤 다양한 미래를 구상 중인 그는 한국 골프뿐만 아니라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인물로 거듭나고 있다. 힘들었던 한국의 운명과 함께 한 박세리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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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시즌 두 번째 대회에서 벙커샷을 날리는 박세리. (스포츠서울DB)

◇신화의 시작, 절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박세리는 프로 데뷔 첫해인 지난 1996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상금왕과 최저타수상까지 쓸어담으며 한국 무대를 평정했다. 이듬해에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퀄리파잉스쿨을 수석으로 통과하며 미국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모든 게 순조롭게 보였다.

그러나 박세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미국 진출 초기는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3년의 적응기를 각오하고 무작정 갔다. 언어, 환경 적응 등을 고려했다. 한국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부딪친 현실은 달랐다. 1~2경기를 마치고 보니 ‘어렵구나,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돌이켰다. 부진한 성적이 이어지자 당시 박세리를 지원했던 스폰서도 귀국을 종용했다.

1998년 1월 첫 경기를 치른 그는 스폰서 계약 파기까지 고려하며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혼자서라도 꿈을 이루겠다”고 고집부렸다. 결국 박세리는 첫 경기 이후 4개월여 만인 그 해 5월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에서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첫 우승 쾌거를 올렸다. 그는 “당시엔 우승하고도 메이저 대회인 줄도 몰랐다. 오로지 경기하고 다음 장소 이동만 생각했다.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대회가 메이저였냐’고 물어봤을 정도로 아무 것도 모르고 겁 없이 달려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 번째 우승이 US오픈이라서 첫 번째 우승은 많이 묻혔다. 하지만 나는 이 대회가 기억에 더 남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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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5월 맥도날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환호하는 박세리. (스포츠서울DB)

◇ 지금도 회자되는 역대급 장면 연출한 US오픈

루키 시즌 첫 우승 이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두 달 뒤 열린 US오픈 참가 역시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대회 들어가기 전까지 가망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자리까지 간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도전하고 싶었다. 0.01%의 가능성을 보고 도전했다. 어찌 보면 무리수였다. 지금 하라면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개저었다.

박세리의 도전은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과 맞물렸다. IMF 한파속에 좌절과 패배감에 젖어있던 국민에게 큰 용기를 심어줬다. 박세리의 성공은 곧 대한민국 국민의 성공이었다. 그는 “당시 우연찮게 스토리가 연결돼 시너지 효과가 컸다. 그만큼 부담도 컸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무엇보다 US오픈이 가장 강렬했던 건 극적인 상황이 연출됐기 때문이다. 박세리의 공은 경사가 가파른 워터 해저드 근처로 떨어졌다. 박세리는 이를 처리하기 위해 양말을 벗고 워터 해저드로 들어가 맨발 투혼을 펼쳤고 연장 승부 끝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샷은 나를 대표할 수 있는 내 생애 최고의 장면”이라고 꼽았다.

◇ 선수 아닌 감독으로 이룬 업적, 116년 만의 골프 올림픽 금메달

박세리는 LPGA 통산 25승으로 역대 최연소이자 아시아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선수로서 누구도 쉽게 따라하지 못할 굵은 선을 그었지만 감독으로서 그가 이룬 업적도 높이 평가받는다. 2016년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올림픽에서 골프가 116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치러졌다. 당시 박세리는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양희영, 김세영, 전인지, 박인비 등의 선수들을 이끌고 21세기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누렸다.

박세리는 “대회 전부터 이미 메달을 딴 것처럼 분위기가 조성돼 큰 부담이었다. 나는 이 부담을 알기에 선수들에게 특별히 주문하지 않았다.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 수 있도록 돕기만 했다”고 겸손해했다. 개인 종목 성향이 짙은 골프의 특성상 팀으로 성공을 이루기에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박세리는 선수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마지막 샷이 홀컵으로 들어가는 순간 박세리는 선수들보다 뜨거운 눈물을 보였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겪은 선수들의 어려움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국에서 골프가 다시 한번 스포츠로서 대중에 다가갈 수 있게 한 계기였다”고 뿌듯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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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사진|윤수경기자 yoonssu@sportsseoul.com

◇ 위세만 커진 한국 골프 걱정

한국 골프의 위상을 드높이고 크게 발전하는데 공헌한 박세리는 지금 비약적으로 변한 한국 골프 환경을 걱정했다. 박세리가 유망주로서 성장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경제 규모도 커졌고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됐지만 정작 동호인이 아닌 선수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은 도태됐다. 박세리는 “겉보기에는 골프가 더 많이 활성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주춤하고 있다. 선수들이 마음 편하게 훈련할 수 있는 골프장이 없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이 훈련하기엔 굉장한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우려했다. 이어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세계 무대에서 한국 골프는 최고로 쳐준다. 한국에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줄 안다. 이런 환경에서도 좋은 선수들이 배출되는 것은 그만큼 선수들의 정신력이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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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사진|윤수경기자 yoonssu@sportsseoul.com

◇ 골프 미래 아닌 대한민국 스포츠의 미래 그린다

박세리는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로서 미래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는 “골프 뿐만 아니라 테니스, 배구,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포용할 수 있는 스포츠센터를 설립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그는 “하계와 동계 올림픽이 모두 열린 나라는 드물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큰 나라다. 태극마크를 단 선수만 좋은 환경(진천선수촌)에서 훈련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 진출해 국위선양할 수 있게 하는 게 목표”라고 힘줘 말했다. 박세리는 “우리 경제가 여유롭지 못하고 (스포츠센터를 건립할) 위치 문제 때문에 조심스러운 상황이지만 크게 이해하고 관심을 갖는 분이 많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나와 같은 미래의 후배를 만들고 싶다. 나와 똑같은 미래를 그리고 스포츠 환경을 개선하는 인물이 탄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바람”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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