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최민지기자] 한국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 이만수(60)의 야구 이력은 화려했다. 16시즌을 한 팀에 몸담았고, 지도자로 보낸 20여 년의 세월까지 더하면 야구와 함께했던 시간 또한 상당하다.


그러나 이제는 현장에서 잠시 벗어나 '나눔의 삶'을 살고 있는 이만수. 최근 만난 그는 전날에도 포항에 내려가 재능 기부 활동을 하고 오는 등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어느덧 '감독'이란 호칭보다 '프로 재능 기부러'란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그와 과거 '야구선수' 이만수의 삶과 현재 '인간' 이만수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 삼성 팬들의 첫사랑, '포수' 이만수


'처음'은 누구에게나 강렬한 인상을 안긴다. 이만수는 프로야구 역사의 시작을 함께했고,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이었다. 삼성 팬들에게 오랜 기간 사랑받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 아닐까. 그는 "프로야구가 처음 생기자마자 팬들에게 유명세를 얻었다. 많은 스타 선수들이 있음에도 아직까지 사랑받고 있는 건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첫사랑과 같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고 향수를 자극했다.


과거를 떠올린 그는 처음 포수 마스크를 썼을 때도 회상했다. 중학생 때까지 외야수였다가 덩치가 좋다는 이유로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포수 마스크를 썼다. 어깨가 좋아 투수와 포수를 오가던 그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포수로만 활약했고, 현역 시절엔 포수로서 100홈런, 200홈런 등 역사를 썼다. 포수라는 포지션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이만수는 "밖에서 보면 각종 장비에 공에 맞고 하는 게 힘들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하다 보면 포수만이 가진 매력이 너무 많다. 앉아서 그라운드 전체를 다 보고 관리한다"며 "팀을 이끌어가는 짜릿함이 있다. 승리할 때의 쾌감과 중요한 상황에서 범타를 만들어 낼 때 그 감정은 정말 최고다"라고 포수의 매력을 나열했다.


보다 많은 스타 포수들이 나오기를 바라며 지난해 '이만수 포수상'도 제정했다. 한 해 최고의 활약을 펼친 아마추어 엘리트 선수들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그는 "선수들의 기피 1호 포지션이 포수다. 이렇게 가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상을 만들게 됐다. 대형 포수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


▲ 초라했던 은퇴, 되레 득이 됐다


팬들의 첫사랑이자 레전드였던 이만수지만, 말년은 다소 초라했다. 구단과의 갈등으로 쫓겨나다시피 하며 허무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것. 이와 관련해 그는 "좋지 않은 관계로 끝난 건 맞지만, 그게 더 성장하게 만들어줬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미국 가서 버틸 수 있었을까 싶다. 편안하게 은퇴하고 대접받았다면, 미국에서 오래 못 버텼을 것 같다"며 되레 동기부여가 됐다고 밝혔다.


이어 "온실에만 있으면 사람은 죽는다. 면역이 생기면 어떤 바이러스가 와도 버틸 힘이 생긴다. 당시 상황이 내 인생 가장 큰 파도였고, 그 파도를 한 번 이겨보니까 지금은 더 큰 파도가 와도 당황하지 않는다"라며 "덕분에 삼성에서 행사할 때도 편한 마음으로 올 수 있게 됐다. 단장, 구단 관계자들과도 편하게 만나서 이야기한다"고 덧붙였다.


이만수는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뒤 좌절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가 지도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미국에 있던 에이전트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주선해줬고, 무일푼으로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IMF 때라 정말 힘들었다던 그에게 미국 생활은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인간 이만수를 깨닫게 됐다. 세상 사람들이 환호했던 이만수는 가짜였구나 싶더라. 나를 아무도 모르는 미국으로 가니까 진짜 내가 누군지 알게 됐다. 지금 이렇게 재능 기부할 수 있는 것도 그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경기장 안에서의 환호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걸 몰랐다면 계속 맴돌았을 것이다."


미국에서 월드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던 그는 한국에 돌아와 SK 와이번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2011년 11월 정식 1군 감독으로 부임해 2014년 물러날 때까지 떨어지는 팀 성적과 함께 비난도 많이 받으며 여러모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만수는 "되돌아보면 참 많이 힘들었다. 그전까지 1등 아니면 2등도 제대로 안 해봤는데, 감독하면서 6등을 처음 해봤다. 악플도 심했고, 가족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었다. 그는 "힘들었지만, 2014년 5등 할 때도 마지막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프로야구 감독하면서 솔직히 아쉬움, 후회는 없다. 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미련도 없다"며 "감독 생활 3년 반하면서 깨달은 건 '리더는 기다림과 인내다'는 거였다. 스스로 감독으로서 점수를 매긴다면 상위급이다. 결과만으로 판단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 제2의 필립 질레트를 꿈꾸다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뒤의 삶은 전과 180도 달라졌다. 야구를 활용한 재능기부와 자원봉사에 나서며 2014년 라오스 야구단을 만들었고, 대한민국 외교부와 라오스 외교부 간의 양해각서 체결에도 공헌했다. 모든 건 제인내 라오J브라더스 대표의 전화 한 통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만수는 "2013년 11월 제인내 사업가로부터 시즌 마치면 재능 기부를 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시간 되면 하러 가겠다'고 답했는데, 사실은 돌려서 말한 거절의 의미였다. 그러나 순수하게 받아들인 제 대표가 계속 연락했고, 결국 야구 장비를 사서 보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2014년 그가 처음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그곳엔 '야구'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그런 곳에서 야구를 알리기 위해 힘쓰기 시작한 건 '꿈이 뭐냐'고 묻는 말에 돌아온 한 아이의 대답이었다. 그는 "'세 끼 밥 먹는 게 꿈이다'라는 대답에 밥 먹는 게 꿈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야구로 꿈과 비전과 힘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얘기했다.


과거 필립 질레트가 YMCA 선교단으로 조선 땅에 야구 장비를 도입했던 것처럼 그 역시 라오스의 야구 선교사가 되는 게 목표다. 이만수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라오스가 야구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겠다는 꿈이 있다"며 "아시아 대회, 세계 대회도 유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지금은 불가능해 보여도, 우리나라가 그랬듯 20년, 30년 뒤에 가능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으로 그는 현재 라오스에 야구장을 건설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2016년 라오스에서 총리 훈장을 받을 당시 "라오스에 와서 이렇게 좋은 일 많이 해줬는데, 부탁할 일 없냐"고 묻는 장관들의 말에 야구장을 지을 땅을 요구했고, 그렇게 면적 2만 1000평의 땅은 무상으로 빌렸다. 건설을 위한 투자만 남았다.


이만수는 지금의 삶에 만족했다. 현장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법도 했지만, 단호했다. 그는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주위를 맴돌게 되면, 내 인생이 없다. 부르지 않으면 고통스럽다"며 "내 일, 재능기부 이런 것들을 열심히 하다가 좋은 기회가 오면 들어가는 거지, 들어가려고 애쓰진 않겠다"고 확고한 소신을 드러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 이만수.


이만수는 한국프로야구 개막전에서 1호 안타, 1호 타점, 1호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을 향해 손 흔드는 아메리칸리그의 이만수 야구코치.


200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이만수 코치가 플로리다 말린스 야구선수 최희섭(오른쪽)을 만나 따뜻하게 격려하고 있다.


SK 신임 이만수(오른쪽) 코치가 입단식 후 팬클럽 멤버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SK 이만수 감독이 2012년 5월 1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과 경기에서 5회 초 2사 이후 연속 안타로 4득점 하자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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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최민지기자 julym@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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