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민
리버풀대 축구산업 MBA 과정 재학중인 장영민 본지 통신원이 MBA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리버풀대 브렛 빌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리버풀 | 장영민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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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완공된 영국 리버풀대 브렛 빌딩에선 각종 MBA 과정 수업이 열린다. 리버풀 | 장영민 통신원
스포츠서울은 영국 리버풀대학교 축구산업 MBA에 재학 중인 장영민 씨의 생활을 담은 코너, ‘장영민의 리버풀대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리버풀대 축구산업 MBA는 세계 최고의 축구산업학 학위 과정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축구팬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 코스입니다. 송전헌(KBS N 부사장), 서형욱(MBC 해설위원), 권성진(풋볼팬타지움 사업본부장), 김찬규(성남FC 부장), 조성대(FC서울 차장), 채승목(서울이랜드 팀장) 등 졸업생들이 국내 축구 현장에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통신원]리버풀에 온 지 정확하게 한 달이 됐다. 지난달 28일 현지 도착 이후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결혼 5년 차인 나는 두 살과 네 살 난 딸을 두고 있다. 학교에서 가족을 위한 별도 기숙사가 제공되지 않아 월 평균 700~1000파운드(110~160만원)에 달하는 플랏(영국식 아파트)을 구해야 했다. 애초 한국에서 집을 알아보고 미리 계약하고 싶었지만 영국은 계약자가 집을 직접 보고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계약할 수 없다. 전화로 현지 중개인을 여러 차례 설득했으나 소용 없었다. 결국 리버풀에 오자마자 우리 가족은 거처 마련에 동분서주했다. 예산에 맞게 집 전체가 카펫이 아닌 마룻바닥으로 된 곳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고 조건 맞는 집이 나오더라도 학생이라는 이유로 여러 번 계약을 거절당했다. 다행히 중개인을 통해 6개월 치 월세를 미리 지급하고 그런대로 살만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현지 의료보험서비스 등록이나 은행 계좌 개설, 세금 문제 해결 등에 시간을 쏟고 부랴부랴 학교생활에 적응하니 금세 한 달이 흘렀다. 1981년생, 한국 나이로 서른 일곱. 한 가정 가장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초, 중, 고, 대학교를 모두 전라남도 순천에서 보낸 나는 어려서부터 축구 선수를 동경했다. 그러나 공을 차는 것엔 특별히 재능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좋아하고 취미로 여길 수 있었던 게 축구였다. 나를 축구의 세계로 조금 더 끌어당긴 계기가 있었다면 12년 전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리버풀-AC밀란전이다. 0-3으로 뒤진 리버풀이 후반에만 3골을 몰아넣고 승부차기에서 짜릿한 역전 우승에 성공해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 경기를 통해 선수와 축구 구단을 위해서 일 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품게 됐다. 때마침 2004년 리버풀대학교 축구MBA 학위를 따온 서형욱 MBC축구해설위원이 쓴 ‘유럽축구기행’을 읽었다. 선수가 아니더라도 행정가 등 다른 분야를 통해 축구 산업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내게 큰 희열을 안겨다 준 리버풀, 바로 그 곳으로 가보자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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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리버풀대 도서관. 리버풀 | 장영민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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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대 축구산업 MBA 과정이 열리는 강의실. 리버풀 | 장영민 통신원

리버풀대 축구MBA는 어학성적(IELTS 6.5이상), 2년 이상 직장 경력, 학사 이상 성적(평균 3.5이상) 및 졸업장, 이력서, 자기소개서, 추천서를 요구한다. 프로그램은 1년 과정이며 학비는 2017~2018 기준으로 2만1500파운드(약 3200만원)다. 당시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학비와 어학이었다. 스물여섯 살이던 2006년부터 휴학한 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야식 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무작정 영국 축구 문화를 우선 현장에서 느껴보고 싶다는 충동에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향했다. 물론 잉글랜드로 가고 싶었으나 비자와 금전적인 문제로 차선책인 더블린을 선택했다. 2년 가까이 지냈는데 내게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줬을 뿐 아니라 축구에서 파생된 영국인의 문화, 우리와 다른 환경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복학한 뒤 2012년 졸업했다.(왜 졸업이 늦었냐고 생각될 수 있는데 사실 난 편입에 편입을 거쳐 각기 다른 대학을 세 군데 다녔다) 서른을 훌쩍 넘긴터라 취업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행히 그해 지역농협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한 나는 미국, 호주로부터 젖소 먹이가 되는 건초를 수입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결혼을 했고 순천에서 여수로 이사했다. 2014년 첫째 딸도 세상에 태어났다. 어느 덧 남편, 아빠의 신분이 된 난 바쁜 업무와 출장에 시달리며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축구MBA를 꿈에 그리던 20대 중반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꿈보다 현실에 가까운 선택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새벽에 잠을 자다가 숨을 쉬지 못할 만큼 심장이 아파왔다. 아내가 부른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이송됐는데 스트레스성 심장 쇼크였다. 그 후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고민을 많이 했다. 아내와 오랜 대화 끝에 20대 시절 내가 꿈꾸던 일에 대해 진중하게 대화했다. 아내는 “축구MBA프로그램이 당신 인생의 모든 것을 보장해주지는 않겠지만, 도전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더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도전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 건 오로지 아내의 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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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민 본지 통신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 세계 각국에서리버풀대 축구MBA 입학생들이 파티를 하고 있다. 리버풀 | 장영민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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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쇼핑거리 리버풀 원(Liverpool 1)에서 본지 장영민 통신원과 아내 신지현 씨, 두 딸 다온, 라온 양(왼쪽 위 시계방향)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리버풀 | 장영민 통신원

2015년 직장을 퇴사했다. 본격적으로 리버풀 축구MBA 진학을 위해 어학시험을 준비했다. 말하기엔 자신이 있었으나 한글로도 쓰기 어려운 논리적인 글을 영어로 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독학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시험이다 보니 소소한 기술이 필요했다. 할 수 없이 주말마다 여수에서 멀리 서울까지 원정수업을 다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열 번에 가까운 실패 끝에 결국 프로그램에 필요한 점수를 얻었다. 사실 2015년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다. 이듬해 리버풀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첫째 딸이 현지에서 너무 외롭지 않겠느냐며 둘째를 낳고 한국을 떠나기를 바랐다. 학교 측에 입학 1년 연기 신청을 했다. 지난해 7월 둘째 딸이 태어났고 올해 꿈에 그리던 리버풀에 입성했다. 듣던 대로 참가자의 국적이나 직업이 다양했다. 콜롬비아, 멕시코, 싱가포르, 캐나다, 남아공 등에서 변호사, 회계사, 호텔 매니저 등 여러 직군의 사람이 몰렸다. 저마다 리버풀에 오게 된 사연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10년 전을 그려 본다. 그때의 마음 한구석을 가득 메운 순수한 열정, 사람 냄새나는 축구를 기억한다. 그 희열을 이곳에서 또 다른 멋진 비전으로 승화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독자와 나누고 싶다.

본지 통신원·리버풀대학교 축구산업 MBA 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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