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포토]
한국 스키 국가대표 1호인 임경순 씨가 2018평창올림픽 D-200을 맞아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경순 씨는 30여년간의 교편을 마감한후 서예와 그림에 흠뻑 빠져있다. 그림은 금강산을 배경으로 남북 선수들이 함께 스키를 타는 장면을 상상으로 그린 장면이다. 2017.07.21.정릉교회 | 강영조기자kanjo@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이정수기자]한국 스키의 모든 역사가 인생에 녹아있고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살아있는 전설’, ‘역사의 산 증인’ 등의 단어는 대한민국 스키 국가대표 1호인 임경순(87) 선생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는 수식어로 느껴졌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던 시절,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지나 한국전쟁을 거치는 격동의 와중에서도 스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놓지 않았던 임 선생은 한국에서 열리는 첫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감회에 젖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올림픽에 나서게 될 후배들에게도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했다.

◇언제일지 몰라도, 올림픽을 꿈꾸며…

1930년생인 임 선생은 어릴적 선친의 일 때문에 중국으로 건너가며 스키를 알게 됐다. 만주 동화에 살면서 일본군들이 스키를 타는 모습을 보며 ‘타보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당시 그곳에는 스키점프대까지 갖춰진 남산스키장이 있었다. 15세 무렵 스키를 시작했는데 눈 쌓인 십리 길을 크로스컨트리 하듯 달려가 팥죽 한 그릇을 먹고 산에서 훈련했다.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던 1944년 6월 선친의 고향인 황해도로 이주했다가 광복 후 공산군을 피해 서울로 내려왔다.

중국에 있을 때는 그나마 스키를 탈 수 있었지만 귀국 후에는 자연환경도, 집안형편도 스키를 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 선생은 “1947년 지리산에서 스키대회를 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다시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거예요. 1949년에 서울에 눈이 많이 와서 아차산에서 스키대회가 열렸는데 그 때 이틀내내 1등을 했죠. 전에 본 적이 없는 기록을 내서 심판들이 스톱워치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라고”라며 웃었다. 하지만 1950년 대관령 지르메산 대회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선수의 꿈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1957년에 대한스키협회가 FIS(국제스키연맹)에 가입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국제대회에 선수를 파견해 1960년 올림픽 출전을 준비하자’는 여론이 생겨났죠.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로 ‘스키를 탔으면 올림픽같은 국제대회에 한 번 나가봐야 되지 않겠느냐’는 나름의 목표를 가졌어요. 3년 동안의 선수권대회와 전국체전 성적으로 대표를 뽑는데 내가 1위였어요”. 언제 있을지 모를 기회를 위해 준비해온 임 선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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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스쿼밸리 동계올림픽 당시 임경순 선생의 투혼은 미국의 스포츠전문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가 대서특필하는 등 ‘한국판 쿨러닝’으로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2017.07.21.정릉교회 | 강영조기자kanjo@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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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동계올림픽 스키 국가대표 1호였던 임경순 선생이 스쿼밸리 대회때 신었던 스키가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알펜시아 스키점프센터의 스키박물관에 전시돼있다.  평창 | 박현진기자 jin@sportsseoul.com
◇제대로 된 스키하나 없이 도전했던 올림픽

일본군들이 쓰던 스키는 벚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새 것도 아니고 남들이 타다 버리는 것만 받아서 썼으니 스키가 멀쩡했을리 없었다. 스키 날 부분이 닳아 둥그렇게 된 상태라 턴을 할 때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1960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쿼밸리는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이었다. “와이프 가락지 팔아서 스키화 하나 장만하고, 스키복이 없어서 일본에서 사려했는데 국교가 제대로 맺어지지 않은 때라 입국이 불가능하더라고요. 스키복은 못샀죠. 일본에서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버스로 이동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던 것 같아요. 다 닳은 나무 스키들고 올림픽에 나간거죠”.

웃으며 지난 이야기를 하던 임 선생은 ‘와이프 가락지를 팔아서 갔다’는 얘기를 하다 슬픈 표정을 지었다. “미국에 가니 제대로 된 스키 하나없이 올림픽에 나온 한국인이라고 화제가 돼버렸어요. 어느날 미국 동계스포츠단 총감독인 리틀 박사가 찾아와서는 ‘스키가 없다며? 어느 종목 출전해?’하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러더니 스폰서 회사에서 유명선수들에게 제공하는 스키를 두 벌이나 주고 가지 뭡니까. 그 고마움을 6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잊지를 못해요”.

그렇게 얻은 스키를 타고 임 선생은 활강과 회전, 대회전까지 알파인 3개 종목에 출전했다. 활강은 70명 중에서 61위, 회전은 70명 중에서 40위를 차지했다. “코스 한 번 타본 적 없는 나로서는 완주할 자신도 없었죠. 리프트도 없는 곳에서 기껏해야 700m 코스를 타던 녀석이 3㎞ 코스를 달렸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내 순위가 생각보다 높은 것은 코스가 쉽지 않아 탈락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천천히 달려도 끝까지 집중해서 얻은 등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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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키 국가대표 1호인 임경순 씨가 2018평창올림픽 D-200을 맞아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경순 씨는 30여년간의 교편을 마감한후 서예와 그림에 흠뻑 빠져있다. 2017.07.21.정릉교회 | 강영조기자kanjo@sportsseoul.com
◇목표를 갖고 후회 없도록 정진하라.

미수(米壽·88세)를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여전히 설원 위에서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요즘 따로 운동은 못하는데 스키는 지난 겨울에도 탔지요”라고 할 정도였다. 단국대 명예교수이자 곤지암스키학교의 명예교장도 맡고 있는 임 선생의 꼿꼿한 자세와 힘있는 목소리는 스키를 조금이라도 더 잘타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단련해온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임 선생은 국내에서 열리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얘기를 하면서 목소리가 더욱 밝아졌다. “동계올림픽은 아무데서나 할 수 없어요. 우리나라가 이제 재정적인 능력이 뒷받침되니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선수들이 이젠 올림픽 메달을 노릴 정도로 기량이 좋아졌어요. 격세지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죠”라며 기쁜 표정을 지어보인 임 선생은 대회를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전했다. “선수들 각자 목표가 있을 거에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성적을 목표로 삼아야 해요. 그 후에는 짧은 시간이 될지라도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보충해야할 부족한 부분이 뭔지를 찾아 훈련의 방향을 맞춰야 한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자세하게 체크하고 분석해야 할 수 있는 일이죠. 그 다음은 훈련은 반복하되 부족한 부분을 얼마나 보충하고 성취했는지를 인지해야 해요. 그래야만 훈련이나 노력이 막연해지지 않아요”.

스키를 독학해 힘겹게 올림픽 무대에 섰던 그는 “경제적 여건이 돼 올림픽 이전에 미국에서 미리 얼마간이라도 훈련했더라면, 지도자들이 있어 한 단계 수준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라고 아쉬워하면서도 후회 없이 도전했던 거세 대한 만족과 성취감에 더 무게를 실었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 속에도 올림픽메달과 관련한 이야기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후회가 없도록 정진하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담았다.

polari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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