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호의 당구 이야기 ⑪] 늦춰진 당구의 사회체육화
    • 입력2017-03-17 06:00
    • 수정2017-03-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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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한국당구의 신화적 존재인 이상천에게 1988년은 당구선수로서 인생의 전환점이 된 해였다. 벨기에 스파에서 벌어진 프로 등용문인 스파 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하면서 세계 시장 진출을 노리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이상천 1988년 미국행 인생의 전환점


이상천은 비록 3회전에서 탈락했지만 15점 3선승제로 진행된 이 대회에서 15개를 단 큐에 끝내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에게 기립박수를 받는 등 뛰어난 경기력으로 그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렸다. 하지만 대회가 끝난 뒤 이상천은 그의 앞날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진다. 한국에 돌아가 봐야 당구선수로 대접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노름빚에 시달릴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이상천은 미국행을 결심한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서울컵국제당구대회에서 이상천.


동양에서 온 왼손잡이 이상천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까지 소문


당시 미국은 포켓 당구가 주류로 케롬 당구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상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떤 형태로던 살아남아야 했다. 누군가 3쿠션을 잘 친다는 소문만 들리면 미국 어디라도 몇 시간이 걸려 찾아가 당구를 쳤다.


그러기를 몇 년, 동양에서 온 왼손잡이 이상천의 경기력에 대한 소문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 선수들, 그리고 BWA(세계프로당구협회) 멤버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럽의 세계적인 선수들이 잇달아 이상천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레이몽드 클루망과 400점 치기 대결에서는 18점차로 패했지만 클루망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브롬달과 경기에서는 승리를 거머쥐며 세계적인 선수들도 긴장할 만큼 인지도를 높였다.


한국 당구의 영웅 이상천.


이상천, 클루망의 도움으로 BWA 멤버 낙점


BWA 선수들과 대결로 존재감을 키워 나가던 무렵, 이상천은 권경순 여사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어느 정도 해결하면서 부인의 도움으로 세계적인 선수들과 친분도 쌓아 나갔다. 이상천은 어느 누구와 경기를 하던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정신으로 최선을 다해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의 신들린 샷에 클루망, 자네티, 야스퍼스, 비탈리스 등 세계적 선수들도 감탄을 쏟아냈다. BWA 최고 실세였던 레이몽드 클루망의 도움으로 BWA 멤버가 된 이상천은 이후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으며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90년 사회체육 당구연합회 조직


1990년 체육청소년부에 사회체육 진흥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한당구연맹 이명화 회장은 사무총장으로 지명한 김동수 선수와 함께 사회체육 조직에 나선다. 하지만 2년여에 걸친 노력에도 결실을 맺지 못 하고 결국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남게 된다.


이 무렵 이명화 회장은 박병문 선수가 운영하던 여의도 당구클럽을 드나들었고, 이것이 인연을 되어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로 발전한다. 이 회장은 일본통인 박병문 선수의 일본 사회체육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회체육 전국당구연합회를 재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여의도 백상당구클럽 1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전국의 내로라하는 40여 명의 선수들을 초청해 설명회를 가졌으며 참가한 선수들의 동의를 얻어 한국사회체육 전국당구연합회를 결성한다. 회장에 이명화 씨와 부회장에 박병문 씨, 사무총장에 김석규, 전국조직위원장에 박태호를 선임했다. 이들 4인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 당구의 사회체육화에 전력을 다한다


육군 대령으로 전역한 이명화 회장은 가수 김세환의 장인으로, 청와대에서도 일했던 엘리트 인사였다. 70~80년대 당시 국내 상황은 군부 출신들의 전성시대였고 청와대나 중앙정보부 출신이라면 '힘깨나 쓰는' 인사로 여겨졌다.


이명화 회장은 당구계의 ‘대부’ 역할을 한 박병문 회장과 인연으로 당구에 관심이 컸으며 다수의 당구인들은 그가 당구 발전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에 ‘줄’을 서는 분위기였다.


후배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박병문 회장(왼쪽), 행정과 경기력을 겸비한 고창환 회장.


▶대한당구경기인협회 고창환 권한대행이 영입한 이명화 회장 돌연 사퇴


1992년 김문장 씨가 한국당구위원회를 결성하면서 SBS서울방송과 방송대회를 추진했다. 이에 당황한 대한당구경기인협회가 해법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 고창환 대구 지회장이 중앙회 회장 권한대행으로서 수습에 나선다. 고창환 권한대행은 선배인 박병문 씨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고 이명화 씨를 대한당구경기인협회 회장으로 추대해 한국당구위원회 사안을 위임하는 쪽으로 협의를 했다. 이명화 회장은 한국당구위원회 문제 해결에 자신감을 보이며 대한당구경기인협회 회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한국당구위원회가 주최하는 한국당구최강전에 대해 가처분신청을 내 중단시킨 다음 협상을 하겠다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당구의 중심은 대한당구경기인협회였는데 두 개의 단체가 운영될 경우 불협화음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송을 등에 업고 김문장 회장이 추진한 한국당구최강전을 중단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이미 대세가 한국당구위원회로 기운데다 일사불란하지 못 했던 대한당구경기인협회 임원들은 이명화 회장의 구상에 힘을 실어주지 못 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힘은 잃은 이명화 회장은 돌연 잠적해 버렸고 선장이 사라진 대한당구경기인협회는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 하고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입장이 난처해진 박병문 전무이사와 함께 한국당구의 사회체육화를 위해 활동을 펼쳤던 이명화, 김석규, 박태호 등 4인은 그렇게 힘을 잃고 만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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