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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서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가 모교 출신 농구 선수들의 유니폼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02.17최재원기자shine@sportsseoul.com

[스포츠서울 위원석 체육1부장]지금은 없어진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과 동대문 서울운동장으로 농구와 야구 경기를 보러가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알던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중학교 2학년때 온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곳은 신천지였다. 또 스포츠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영어 한마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소년에게는 당연히 낯선 땅이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TV 스포츠중계를 열심히 보면서 영어를 익혔고,친구들과 농구를 같이 하면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대학과 대학원을 미국에서 마친 뒤 글로벌 대기업의 마케팅업무를 하면서 사회 생활을 하게됐고, 나이키에서 일할 때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의 지원업무를 맡게되면서 우상이었던 차범근 당시 대표팀 감독과도 깊은 교류를 나누게 됐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의 충격 이후 대한민국의 스포츠영웅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하는 ‘황색 스포츠언론에 대한 분노와 경박한 스포츠팬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기 위해서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인터넷 스포츠사이트’를 표방한 후추닷컴을 만들었다. 후추닷컴을 통해서 소개된 여러가지 글들, 특히 30편에 달하는 ‘후추 명예의 전당’은 깊이있는 스포츠콘텐츠를 갈망하던 팬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그러나 후추닷컴은 일부의 열광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상업성 확보를 통한 확대재생산에 실패했고 그는 쓸쓸히 또다른 꿈을 품은 채 미국으로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스포츠행정으로 박사학위를 딴 그는 샌프란시스코 스포츠경영학과에서 교수의 길을 걷다가 홀연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에 터를 잡은 그는 새로운 사명감으로 ‘디머스(DeMerS)’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아직 국내 프로스포츠 업계에서 중요성에 비해서 홀대받고 있는 스포츠 디자인, 스포츠 머천다이징, 스포츠 세일즈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해 내겠다는 것이 그의 욕심이다.한때는 ‘후추 주방장’이란 별칭으로 필명을 떨치다가 지금은 ‘디머스 전도사’로 변신한 최준서(48) 교수를 만난 것은 스포츠를 사랑했던 한 소년이 어떻게 스포츠와의 인연을 평생 이어가면서 지금도 이 바닥에서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살아가는지를 연대기순으로 한번 훑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지난 17일 1988 서울올림픽 배구경기가 열렸던 유서깊은 한양대체육관 내의 최 교수 연구실에서 2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서울에서 태어나 10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청소년기를 스포츠 천국에서 보낸 것이 자신의 스포츠관을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됐는가. 어느 글에서 ‘스포츠를 사랑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스포츠를 통해서 꿈과 희망을 키우며 살아왔던 경험자이기 때문’이라고 썼던데.

1982년 1월 미국 뉴욕으로 이민갔을 때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학교에서 첫 6개월 동안 나는 교실의 책상이나 걸상 정도의 존재였을 것이다. 말귀를 못알아들으니 친구들과 소통을 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호기심이,다른 한편으로는 절망감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미국이란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철저한 관찰자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들이 농구를 하는 것을 그냥 구경하고 있었는데 마침 팀원이 한명 모자랐다. 누군가 나에게 ‘농구를 할줄 아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잘했다. 그 순간부터 내 모든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매일 친구들과 농구를 같이 했다. 당시 나에게 스포츠는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생존 전략 그 자체였다. 영어를 배우는 주요한 통로도 스포츠중계였다. 프로레슬링을 보고,연고지 야구단인 양키스와 메츠의 중계에 열중하면서 서서히 귀가 열렸다. 학업보다는 미국이라는 스포츠천국에 직간접적으로 매료됐다.

-그렇게 스포츠를 좋아하면서 학사(펜실베니아대)와 석사(뉴욕대) 과정은 모두 불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글로벌기업의 마케팅 업무를 했는데.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중고교 시절 매일 종교처럼 많이 했던 일이 바로 신문의 스포츠면을 보는 일이었다. 뉴욕타임즈의 스포츠섹션이나 USA투데이를 습관적으로 읽었다. 학교에서도 농구 야구 동아리를 열심히 했다. 이렇게 스포츠를 좋아했던 열정을 내 인생의 진로와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선수 아니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낙심하기도 했다. 대학교 3학년때 전공을 결정하는데 프랑스말의 소리가 너무 좋았다. 철학 사상 문학쪽의 책을 많이 읽었던 것도 영향을 줬다.

전공을 정할 때 아버지과 다툼도 많았다. 한국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미국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다면 굶어죽기 딱 좋다고 생각했다(웃음). 내가 대학원을 진학할 때만 해도 스포츠행정이나 스포츠외교쪽의 개념이 별로 없을 때였는데,하버드대의 케네디대학원 행정스쿨에서 스포츠외교 과정이 있었다. 그래서 올림픽 등에 대한 국가행정과 외교에 대한 에세이를 써서 지원했는데 마지막까지 남았다. 합격할 것으로 생각하고 보스톤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안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학원 때는 공부가 지겨웠고 빨리 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국내에 들어와서 헤드헌터에게 이력서를 넣어놨는데 당시에는 해외유학파나 영어능통자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많았다. 한국코카콜라에 입사하게 됐다. 첫 보직은 영업이었다. 맥도날드같은 주요 고객관리와 공동프로모션 등을 담당했다. 이때의 영업 경험이 나중에 큰 도움이 됐다. 시장과 필드의 중요성을 알았다. 영업과 마케팅의 시너지가 없다면 탁상공론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파워에이드 브랜드 론칭을 준비하면서 나이키와 공동마케팅을 진행하게 됐는데,그것이 계기가 돼서 나이키로 옮기게 됐다.

-나이키에서 축구국가대표 지원 업무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스포츠와 연을 맺었고,프랑스월드컵 이후인 1999년 31살의 나이에 그 유명한 후추닷컴을 만들었다.

(후추를 만들었을 때)내가 불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할 때 보다 휠씬 더 주변의 반대가 많았다. 홍콩에서 나이키 아·태지역 마케팅을 하고 있었는데 마케터로서는 꿈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2년 정도 하다 보니 재미가 없었다. 당시 나이키 아·태본부는 일본을 제외하고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 10개 국가를 총괄했는데 우리는 미국 포틀랜드 본사에서 내려오는 매 시즌 어패럴 마케팅 전략을 가지고 각 나라에 가서 독려하는게 주업무였다. 또 각국 시장의 소비자 성향같은 자료를 모아서 본사로 올려보내는 일을 했다. 그냥 중간 일을 한 것이다. 내 스스로 올인해서 책임을 지고 성패를 느끼는,그런 것에 목말랐다.

책임이 없었으니 성취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침 1999년 봄 국내에서 인터넷 창업 붐이 일었고,창업을 해서 망해도 젊었을 때 하자는 패기가 있었다. 후추닷컴에서 만드는 콘텐츠로 돈을 벌기는 힘들었으니,내가 알고 지내던 기업의 스포츠마케팅쪽 일을 컨설팅해주면서 돈을 벌어서 직원들 인건비로 충당하고 남은 부분을 다시 후추에 투자하는 식으로 운영했다. 그런 식으로 3년 넘게 내 모든 것을 바쳐서 일했는데 이래 가지고서는 내 청춘의 기회비용이라던가,향후 이 일에 인생을 투자할 만한 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접게 됐다.

-그렇다면 후추닷컴을 시작했을 때 사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나.

물론이다. 사업적으로 승부를 보려고 시작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당시에는 온라인 광고시장이란 것이 거의 없었다. 나중에 직원들과 후일담을 하면서 “후추닷컴이 딱 10년이 빨랐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의 온라인 광고시장 환경이 지금 같았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웃음). 자생력을 갖고 계속 갈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후추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 정도 실질적으로 운영됐고 그 이후 6개월은 정리하는 절차였다. 학계나 업계 전문가들이 2002년 월드컵 이후 국내 스포츠마케팅 시장이 크게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런 것이 없었다. (최근 대규모 투자를 받은)스포티즌도 당시 창업했던 회사였다. 당시 몇개 회사들이 뭉치자 그런 논의도 했다.

-짧고 굵게 생존했던 후추닷컴이 우리의 스포츠미디어 문화나 스포츠콘텐츠를 만드는 방식을 얼마나 바꿔놓았던 것 같나.

내가 다시 미국으로 박사과정을 떠난 2002년 이후 10여년 동안 사실 국내 스포츠 미디어를 잘 안봤다. 후추를 접고 미국으로 갈 때는 상처와 애증의 감정이 꽤 크게 남아있었다. (지금 살펴보면)후추 칼럼니스트 출신 가운데 현재 스포츠미디어에 종사하는 분이 여럿 있다. 또 요즘 나오는 칼럼이나 글을 보면 ‘후추틱’하다고 생각되는 글이 꽤나 있다. (이런 글을 쓴 분들에게)혹시 후추에서 영감을 받았느냐고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지만 후추와 비슷하거나 영향을 받은 것같다는 감은 갖고 있다. 후추 칼럼니스트 출신으로 현역에 있는 친구들도 후추 정신을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장 유명세를 탔던 후추 명예의 전당은 헌액자가 30명에 달한다. 대부분은 직접 썼는가. ‘명전’을 이어가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은.

3분 정도를 빼고 나머지는 거의 내가 썼던 것 같다(한 명당 70% 이상의 글이 직접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당시 명전에 올릴려고 했던 분들이 (기존 언론에 불신이 있어서)섭외가 너무 어려웠다. 대부분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래서 이전에 나온 명전 원고를 보내주곤 했는데 그러면 대부분 응해주셨다. 명전 1호였던 황선홍 선수도 기억이 많이 난다. 배드민턴의 박주봉 선수는 본인이 영국에 있어서 전화 인터뷰를 한 뒤 나머지 자료나 인터뷰를 부친이 모두 챙겨주셨다. 기사가 난 뒤 부친께서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양궁 김진호 선수도 섭외하기 너무 힘들었는데 나중에 감사 인사를 받았다.

-‘명전’ 30명을 보면 야구 6명,축구 5명,농구 4명,배구와 복싱 2명씩으로 상대적으로 많다. 팬들이 많은 인기스포츠를 의식한 결과였나.

전혀 아니었다. 당시에는 프로야구나 축구 인기가 요즘만큼은 아니었다. 후추는 오히려 비인기 종목의 재조명에 관심이 더 많았고, 프로쪽 선수들도 나름 억울했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후추 명전 가운데 2012년 장효조,최동원편을 두권의 책으로 묶어냈는데 혹시 앞으로도 후추가 만들었던 콘텐츠를 되살리고 싶은 계획이 있는가.

간혹 한번씩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다. (더이상)책의 형태는 아니라는 생각은 든다. 그 정도의 상상에 그친다. 지금은 내 코가 석자여서 엄두가 안난다. 사실 두권의 책을 낸 것도 후추를 할 때 가장 열성적으로 응원해줬던 누이가 2011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에 대한 추모의 성격이 강했다. 가끔 후추를 복원해 스포츠전문 라디오쇼같은 것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요즘 스포츠미디어의 여건은 후추닷컴이 등장했을 때보다 더 혼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대안매체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지금의 스포츠미디어 종사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런 혼돈도)다 생존경쟁 때문 아니겠는가. 이해되는 측면도 있고 안타까운 부분도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뉴미디어가 확산되면 다양성이 더 많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없어지고 있다. 콘텐츠를 전달하고 소비하는 플랫폼만 다양해지고 관점의 다양성은 오히려 쇠퇴하는 것아니냐는 아쉬움이 있다. 미디어가 굉장히 중요하다. 요즘 스포츠 콘텐츠가 그냥 네이버로 다 소화된다. 편의성은 뛰어나지만 거기에 많이 압도당한다. 스포츠 서적도 보고 다큐멘터리도 나오는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서 스포츠 콘텐츠가 소화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후추닷컴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떠나서 스포츠행정 박사과정에 들어간 계기는.

우선 한국을 뜨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나의 다음 커리어도 생각해야만 했다. 내가 10년 정도 이 업계 바닥에서 일했는데 이런 실무경험을 겸비한 교수는 당시 미국에도 흔치 않았다. 교수로서 경쟁력이 있겠다고 판단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는 교수를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자신도 있었다. 솔직히 근거는 없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 학위를 따낸다면 교수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은 있었다.

-학위를 딴 뒤 샌프란시스코대 스포츠경영학과 교수로 있다가 한양대 교수로 국내에 복귀했는데 국내 스포츠계에 자극을 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나.

전혀 아니다. 100% 가족사 때문이었다. 누이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어머니의 상처가 너무 컸다. 누군가 그 옆에 있어줘야만 했다. 내 아이들이 어리니,부모님들이 얘들을 보는 재미에 슬픔을 잊지 않겠느냐고 판단했다. 집안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미국에 계속 남았을 가능성이 휠씬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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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서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가 연구실 서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2016.02.17최재원기자shine@sportsseoul.com

-지난 해부터 한양대에서 ‘디머스 전도사’로 나섰는데 ‘디머스(DeMerS)’란 말이 국제적으로 상용되는 용어는 아닌 것같은데.

국내 스포츠산업이 지난 15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했지만 유독 스포츠 디자인,스포츠 머천다이징,스포츠 세일즈의 세 분야는 미개척 분야로 남아있다(최 교수는 디자인,머천다이징,세일즈의 중요성과 개념을 확실히 국내 업계에 전달하기 위해서 이 단어들의 머릿글자를 따서 ‘디머스’란 조어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말하자면 디머스는 최 교수가 만든 실용적 학술용어인 셈이다). 다른 파트와 ‘디머스’ 분야와의 갭을 줄이는데 힘을 보태기 위해서 한양대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것이다.

-국내와 해외 선진 업계를 비교하면 디머스 분야에서는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보는가. 우리가 우선적으로 보강할 점은.

선진국을 100으로 친다면 우리는 30정도라고 본다. 세 분야에서 공히 그렇다. 독일 알리안츠 아레나와 서울이랜드의 잠실구장을 비교한다면 가장 일차원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럽 구단은 팀 스토어만 가도 마치 백화점에 온듯 각종 상품이 구색을 맞춰 있다. 우리는 최고 시장이라는 야구장에 가도 임시판매대나 가판대에서 물건을 파는 실정이다. 가장 큰 차이는 영업력에 있다. 미국 프로구단 프런트의 최소 40%는 세일즈맨이다. 국내 구단의 경우 세일즈 전담 직원이 한,두명이라도 있다면 꽤나 신경을 쓰는 편이다. 아예 없는 곳이 많다. 그런 부분들을 따라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구단마다 쫓아다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젊은 학생들의 인식을 먼저 바꾸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구단 변화에 촉매제가 될 수 있다.

-디머스에 대한 국내 프로스포츠 단체와 구단들의 인식은 어느 정도라고 보는가. 변화의 조짐은 보이는가.

젊은 20,30대 프런트들은 디머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공감하고 있다. 아직 지원이라는 측면에서는 여건이 안되는 부분도 있지만 지난 1년 동안 국내 구단의 구인 현황을 보면 디머스 관련 직원이나 인턴 채용이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 실제 시장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국내 시장의 열악한 환경을 고려하면 디머스를 통한 구단의 자생력 확보가 과연 어느 정도 가능할까.

해외 선진구단들도 머천다이징을 통해서 얻는 것은 총매출의 최대 10% 정도다. 주수입원은 역시 중계권료와 스폰서십 등이다. 디머스는 원래 규모가 적은 분야다. 하지만 디머스는 재정적인 부분 보다는 구단의 브랜딩에 실질적인 효과가 있다. 디머스를 통해 구단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중장기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디머스를 통해서 갑자기 자생력이 강화된다고 보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하지만 구단 정체성 확립과 브랜딩을 위해서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세일즈의 중요성도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구단 모기업의 지원금이 해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어 의존도를 낮춰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구단 내부의 방향이 잘 잡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객단가나, 관중 점유율 등이 두 세배씩 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 5년 전만 해도 세일즈를 통해 매출을 올려야 한다는 필요성조차 각 구단들이 못느꼈다는 점이다. 이제는 가야만 하는 방향에 대해서 구단과 모기업이 다 공감하고 있으니 그런 역할을 해줄 사람을 누군가는 키워내야 하지 않겠는가.

신입사원이 됐든, 경력사원이 됐든 이러한 교육을 받고 영향을 받은 친구들이 선도적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후추를 할 때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었다. 물론 해외 선진국의 사례가 국내에 100% 적용될 수는 없다. 우리는 벤치마킹을 통해서 한국형 모델을 찾아가야만 한다. 이런 일을 누군가는 펌프질을 해야 한다. 한양대에서 시도하고 있는 디머스 교육이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다.

-지금까지 국내 디머스와 관련해 인상적이었던 성공사례나 실패사례를 꼽아준다면.

일반 팬들이 아는 것보다 국내 구단들이 나름대로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 한화 이글스의 홈구장 팀 스토어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지난 해 한화 열풍의 영향을 받았던 점도 있었겠지만 팬들이 경기 시작 전은 물론 중간에도 구매를 위해 길게 줄을 섰고,상품도 다양하게 구비돼 있었다. 국내 소비자들도 양질의 재미있는 상품,구단에 대한 로열티를 표현할 수 있는 아이템을 원하는 수효가 분명히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실망스러운 사례는 소치동계올림픽때 느꼈다.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 시상대에 올라가는데 입고 있는 우리 선수단 트레이닝복이 너무 괜찮았다. 그 아이템을 갖고 싶었는데 도저히 살 통로가 없었다. (그 유니폼을 스폰서한 업체의)백화점 매장에 가도 없었다. 백화점 직원이 본사에서 방치를 했다고 설명한 기억이 난다. 이런 것은 대한체육회와 의류 스폰서 업체의 직무유기다. 팀코리아를 브랜딩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렸다. 재고 부담을 안을 정도로 많이 찍으라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조치라도 필요한데 그런 것이 아쉬웠다.

-디머스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통로가 국내에 어느 정도 확보돼 있는가.

디머스라는 말 자체는 아직 생소하지만 내용적으로 그 중요성은 크게 인식하고 있는 변화가 일고 있다. 예를 들어 K리그 구단 관계자라면 이제 이 개념과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를 전문으로 디머스를 배울 수 있는 통로는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패션 머천다이징 공부는 여러 곳에서 할 수 있겠지만 스포츠 머천다이징은 조금 다르다. 스포츠와 디머스를 융복합해서 가르치는 곳은 국내에서 한양대가 유일한 것 같다.

우리의 목표는 미대에서 4년 동안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보다 더 디자인을 잘하는 인재를 배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을 미대 출신보다 더 잘할 수도 없고, 국내 구단도 전문적으로 디자인만 하는 인원을 뽑을 여력도 없다. 우리는 디자인도 하면서 동대문시장의 영업현실도 알고 있는 ‘360도 스포츠마케터’, 축구로 비유하자면 멀티플레이어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한양대에서는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모두 디머스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학부의 스포츠산업학과는 교육부 수도권 대학 특성화 사업 선정학과이고, 대학원 과정은 문체부에서 시행하는 스포츠산업 융복합형 인재육성과정의 선정학과다.

-마지막 질문이다. 먼 훗날 국내 스포츠계에서 최준서라는 사람은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는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데, 통념이나 관행을 깨려고 노력했던 사람,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나는 그 동안 같은 일을 5년 이상 해본 적이 없지만 지난 20년 동안 했던 일에는 스포츠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 스포츠 관련 일이 천직같기는 하다. 교수로서는 학생들에게 기회를 줬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batma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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