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은행 여의도 영업부 전경
사진은 KB국민은행 서울 여의도 영업부. KB국민은행은 지난 10월 30일부터 의심 고객에 한해 제출하도록 했던 ‘금융거래목적확인서’와 증빙서류를 모든 고객들에게 받고 있다.  제공 | KB국민은행

[스포츠서울 박시정기자] 직장인 이모씨는 최근 지인에게서 빌린 2000만원을 새로운 통장을 개설해 입금하려다가 발길을 돌렸다. 별도 통장을 만드는 게 좋을 듯해서 신규 통장을 발급받기를 원했지만 은행 직원은 거주지나 직장 인근 지점에서 만드는 게 좋겠다며 신규 통장 발급을 거절했다.

취업준비생으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강모씨는 과외비 관리 통장을 발급받기 위해 집 근처 은행 지점에 갔다가 과외비 통장이라는 걸 증명할 증빙서류를 갖고 오라는 말에 당황했다. 사업자등록증을 낸 것도 아니고 근로계약서를 쓰고 과외 지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증빙서류를 가져올 수 있느냐고 얘기해봤지만 헛수고였다.

국내 은행들이 올해 초부터 신규 통장 발급 요건을 강화하면서 통장 만들기가 상당히 어려워졌다. 무직자들 사이에서는 ‘통장고시(考試)’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직업이 없는 노인들도 통장 만들기가 여의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증빙 서류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경우도 많고, 있다고 해도 어디서 떼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다. 신분이 확실하고 직업이나 직장이 확실한 경우에도 통장을 신규로 만들려면 증빙 서류를 떼서 제출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언제든지 만들 수 있었던 흔하디 흔한 통장이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귀한’ 통장으로 바뀐 것이다.

◇ 은행 통장 발급 얼마나 어려워졌나

2014년 5월 ‘특정 금융거래 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내년 초 시행된다. 차명거래를 통한 자금세탁, 조세 포탈, 비자금 형성, 대포통장 등 불법적인 금융 거래를 방지하기 위해 통장의 실제 소유자를 확인하고 고객이 관련 정보 제공을 거부할 경우 거래를 거절하는 것이 개정 목적이다. 주요 은행들은 올해 초부터 대포통장 근절을 위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신규 통장 개설 절차를 강화했다.

우리은행은 방문 영업점에서 먼 자택이나 직장의 주소를 기재하거나 단기간에 다수의 계좌를 개설한 개인에 대해서는 계좌 개설을 거절한다. 사회초년생이 급여통장을 개설할 경우에도 급여 증빙자료를 제출하도록 하고 주부가 입출금 용도의 통장을 개설할 경우에는 최초 5만원 이상 입금, 관리비 자동이체 등 몇 가지 사례에 한해 허용한다. 대리인이 미성년자 고령자 신용불량자와 함께 내점해 계좌 개설을 요청하는 경우에는 계좌 개설을 거절한다.

KB국민은행은 의심 고객에 한해 제출하게 했던 ‘금융거래목적확인서’와 증빙서류를 지난 10월 30일부터 모든 고객들로부터 받도록 했다. 개인 급여계좌 개설 시에는 재직증명서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급여명세표 중 하나를 내도록 했고, 법인 계좌 개설 시에는 물품공급계약서 재무제표 부가가치세증명원 납세증명서 중 하나를 제출하게 했다. 모임계좌의 증빙서류는 구성원 명부, 회칙 등이다.

IBK기업은행은 단기간 다수 계좌 개설자, 대포통장 명의인, 단독으로 내점한 미성년자, 여권 여행자 증명서만 소지한 외국인, 기타 대포통장 의심고객에 대해서는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증빙서류를 반드시 제출하도록 한다.

◇ 끊이지 않는 민원, 영업점마다 조금씩 다른 대응

민원의 상당 부분은 증빙 서류가 마땅치 않은 경우에 발생한다. 과외비의 경우 입증할 만한 증빙서류가 마땅치 않다. 은행들이 자체적으로 정한 신규 통장 발급 기준의 사각지대가 크다. 신한은행은 신규 통장을 발급받으려는 사유나 조건이 워낙 다양하는 점을 고려해 현장에서 유연하게 대응하도록 하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금융거래 목적이 불분명한 경우 이체한도를 축소해 계좌를 발급함으로써 고객들의 불편을 줄여준다.

은행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른 점도 문제다. 어느 은행의 경우에는 기존 거래 고객인데도 불구하고 원격지라는 이유로 신규 계좌 발급을 거절하고, 어느 은행은 기존 거래 실적이 있으면 신규로 발급해준다. 집 근처 은행에서는 재직증명서를 떼올 것을 요구했으나 회사 근처 은행에서는 명함 한 장만으로도 통장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은행마다, 지점마다 조금씩 다르게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쉽게 통장을 발급해주는 은행을 찾아다니는 ‘은행 쇼핑’까지 생겨나고 있다.

◇ 효과 크지만 보완 통해 고객 불편 줄여야

고객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지만 규제를 완화할 수는 없다는 게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금융감독원은 올 상반기 금융 사기 피해액이 1565억원으로 지난해 하반기의 2023억원에 비해 22% 가량 줄었다고 발표했다. 신규 통장 발급 요건을 까다롭게 바꾼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KEB하나은행은 대포통장 비율이 지난해 하반기 0.26%에서 올해 상반기 0.09%로 감소했고 올해 하반기(11월 30일까지)에는 0.02%로 줄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은행 자체 판단 기준에 없는 사례들이 많아 판단 기준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업계 한 관계자는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것 못지 않게 신규 통장 발급 기준을 좀 더 상세하게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직원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 모든 지점의 직원들이 동일한 기준에 따라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은행은 고객들이 자신들이 만든 기준을 따를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말고 소비자 민원 발생을 원천적으로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charli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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