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현의창과창

[스포츠서울]결전의 무대에 서야 하는 스포츠 선수들과 예술가들 중엔 ‘무대 체질’이라고 불리는 부류들이 꼭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빌빌거리다가도 정작 빅 이벤트에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기어코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는 그런 스타일이다. 경쟁자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부럽기 그지 없다.

몰입과 집중을 통해 실핏줄에 녹아있던 한 점의 에너지까지 폭발시키는 그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걸까. ‘무대 체질’이라고 불리는 승부사들이 빅 이벤트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결국 의심과 두려움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생각은 우사인 볼트(29·자메이카)가 2015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보여준 ‘폭풍 질주’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됐다.

볼트는 지난 2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도 그럴 게 최근 기록 추이나 컨디션을 종합해 볼 때 미국의 저스틴 게이틀린(33)의 일방적인 우세가 점쳐졌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 직전까지 올 시즌 남자 100m 1~4위(9초74,9초75,9초75,9초78)를 휩쓸었던 게이틀린의 상승세는 볼트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볼트는 올 시즌 내내 10초대에 머물다 이번 대회 직전인 지난달 25일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다이아몬드리그에서 처음으로 9초대(9초87)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게이틀린은 예선과 준결승까지 모두 볼트를 앞서며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예고했지만 정작 결승무대에선 승부사 기질로 똘똘 뭉친 볼트의 역주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볼트와 같은 승부사들이 큰 무대에 강한 이유는 다른 선수들에 견줘 스트레스 극복 능력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승부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스트레스에 시달리곤 한다. 자신의 경기력을 굳게 믿지 못하는 의심과 강력한 경쟁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찾아오는 스트레스다. 클래스가 있는 선수들의 성패는 결국 의심과 두려움에서 야기되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무대 체질’인 승부사들은 대체적으로 의심과 두려움을 경기력에 도움이 되는 적절한 긴장감으로 치환하는 능력을 지녔다. 의심과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게 되지만 이를 적절한 긴장으로 변환시킬 수만 있다면 기적의 퍼포먼스가 연출된다. ‘무대 체질’로 불리는 승부사들은 바로 그런 능력을 지닌 선수들이다.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면 큰 경기에 강한 볼트와 극명하게 오버랩되는 선수가 눈에 띄어 안타깝다. 바로 한국 단거리 육상의 간판 김국영(24·광주시청)이다.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기록 경신이 기대됐던 그는 예선에서 10초48을 기록하며 탈락했다. 지난달 9일 광주 유니버시아드에서 10초16의 한국 신기록을 세워 자력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던 그였지만 정작 멍석이 깔린 무대에선 제 기록도 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김국영은 잠재력은 있지만 큰 무대를 즐길 수 있는 ‘끼’와 ‘깡’이 아직 부족해 보인다. 지금까지 두 차례의 한국신기록도 시선이 집중된 결승무대에서 작성하지 못했다. 2011 대구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심리적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며 부정출발로 예선 탈락했다.

스트레스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적절한 긴장감으로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유스트레스(eustress)’와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디스트레스(distress)’다. 스포츠 선수들은 의심과 두려움을 잘 컨트롤해 ‘유스트레스’로 바꾸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큰 경기에 강한 승부사의 능력이다. 한국 육상의 기대주 김국영이 꿈의 기록이라는 9초대를 찍기 위해선 반드시 키워야 할 힘이기도 하다. 흔히 승부사의 기질은 타고 난다고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땀과 노력으로도 충분히 키울 수 있다.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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