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현의 창과 창 컷

[스포츠서울 | 고진현전문기자]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가슴이 미어지지만 그 고통에 신경쓰기 보다는 호흡을 가다듬고 사건의 전모를 꼼꼼하게 따져보며 복기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래야만 인재(人災)의 쓰라린 경험을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지난주 한국 체육이 발칵 뒤집혔다.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과정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게 뇌물이 전달됐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에 실린 단독 인터뷰에서 이 같이 주장한 인물은 김호(67)라는 한국인이다. 세계태권도연맹(WT) 홍보마케팅부장과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 사무총장을 역임했던 그는 “IOC 부위원장을 지낸 고(故) 김운용 WT 초대 총재 시절인 1994년 프랑스 파리 IOC 총회에서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하기 위해 IOC 위원들에게 현금과 자동차 등 뇌물이 전달됐다”고 주장한 뒤 “복싱 종목에서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 금메달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의 뇌물이 요구되기도 했고, 2012년 런던올림픽 때는 아제르바이잔이 금메달을 제안받은 후 대출 형태로 1000만 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국제 스포츠계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비리를 제보한 김호라는 작자는 언뜻 무슨 정의의 사도(使徒)인 듯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사기꾼에 불과하다. 지난 2015년 AIBA 사무총장에서 해임된 그는 2018년 영구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받고 국제 스포츠계에서 퇴출된 ‘어글리 코리언’에 다름 아니다. 그랬던 그가 마치 양심선언을 하는 ‘휘슬 블로어(내부 고발자)’를 자처하며 조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를 들먹인 이유는 무엇일까? 궁지에 몰리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인(sign)을 특정인에게 보내면서 의도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거나 궁벽한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는 시도가 아닌지 의심된다. 김호는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아직 탄탄한 뿌리를 내리지 못한 태권도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온갖 추문을 가공해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김호라는 국제적인 사기꾼을 미리 솎아내지 못한 정부와 한국 체육계의 작은 실수가 거대한 쓰나미로 되돌아 올지도 모를 일이다.

김호의 양심 선언(?)이 터진 뒤 난데없는 전화가 필자에게 쇄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호를 향해 ‘총성없는 전쟁’을 펼친 사실상 유일한 사람이 필자였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김호의 실체를 간파한 필자는 그가 한국 스포츠계와 대한복싱협회에 전횡을 부리기 시작한 2009년부터 무려 10여년간 비판기사를 쏟아내며 싸웠던 전력이 있다. 원래 나쁜 작자와 싸우는 데는 이골이 난 필자지만 솔직히 김호와의 싸움은 지난했다. 그와 결탁된 복싱계 인사들은 필자를 겁박하기 위해 왈짜패를 신문사에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김호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무리들은 수 차례의 소송도 걸어왔다. 그것까지는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기꾼에 불과한 그를 조직적으로 비호한 정부와 거물급 인사들의 위선과 압력은 솔직히 인내하기 힘들었다

김호의 존재는 이상 야릇했다. 실력도 없이 한국 최고의 국제 스포츠 전문가로 자리를 잡은 것도 그랬지만 그의 마수에 걸린 수 많은 사람들과 조직들이 번번이 사기를 당하면서도 입 한번 제대로 뻥끗하지 못하는 기현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다. 국제 스포츠 인맥을 한껏 부풀린 그의 사기행각에 IOC 위원 입성을 로망으로 여긴 국내 재벌그룹 총수들은 마법에 홀린 듯 빨려 들어갔다. 김호에게 이권을 편취당한 총수는 한 둘이 아니었다.

대한복싱협회는 김호의 장난에 숫제 거덜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장 선거에서 패한 국내 특정파벌이 김호와 결탁해 새로운 방식의 체육단체 사유화를 획책했다. AIBA는 2009년부터 무려 10년간 대한복싱협회에 상식밖의 징계를 남발하며 한국 스포츠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 AIBA의 대한복싱협회 탄압은 IF(국제스포츠경기단체)가 개입한 국내 체육단체의 교묘한 사유화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누가 김호를 비호했는가. 김호를 양아들이라며 한국 체육에 끌어들인 원로 체육인부터 대한복싱협회장을 역임한 두 명의 정치인, 김호의 주문대로 대한복싱협회를 관리단체로 지정한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그리고 김호에게 ‘억’ 소리나는 후원금을 쏟아부은 대기업 등…. 그들은 과연 김호가 조국을 향해 쏜 반역의 총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금에서야 모두 김호의 실체를 몰랐다고 항변하겠지만 그들 모두는 김호의 반역에 함께 한 공범이라는 게 10여년을 발로 뛰며 취재한 필자의 확신이다. 이제서야 실체가 드러난 김호의 만행(蠻行)을 지켜보면서 떠오르는 단상(斷想)이 서글프기 그지없다.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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