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윤세호 기자] 구종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에이스로 부족함이 없다. 성장 과정이 그렇다. 프로 입단 초기에는 체인지업이 주무기였던 기교파 좌투수. 그런데 자신만의 훈련법을 연구하고 터득해 구속 향상을 이뤘다. 빅리그 무대에도 올랐고 이후 아시아에서 선발 투수 도전에 임했다. LG 새 외국인 투수 디트릭 엔스(33) 얘기다.

구속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속이 투수를 평가하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잠재력을 진단하고 타자를 상대하는 데 있어 핵심 요소는 분명하다. 신인 드래프트만 봐도 그렇다. 구속 혹은 구위 순서로 투수가 지명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남다르게 빠른 공을 던지면 프로로 향하는 문도 활짝 열린다.

엔스는 이례적인 케이스를 만들었다. 아마추어 시절 강속구 투수로 분류되지 않았다. 그만큼 드래프트 순위도 밀렸다. 2012년 신인 드래프트 19라운드에서 뉴욕 양키스의 지명을 받았다. 마이너리그 시절 미네소타로 트레이드됐고 2017년 고대했던 빅리그 마운드에 섰으나 그에게 허락된 것은 2경기 4이닝이 전부였다.

메이저리그(ML) 통계 사이트 팬그래프에 따르면 2017년 빅리그에서 엔스의 속구 평균 구속은 89.6마일(약 144㎞)이었다. 당시 엔스는 정면 승부보다는 체인지업을 활용해 타자의 타이밍을 흔드는 투구를 했다. 하지만 구속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샌디에이고, 시애틀로 팀을 옮겼으나 빅리그와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로 인해 실업 위기도 마주했다. 2020년 마이너리그가 문을 닫으면서 시애틀은 엔스를 방출했다. 그런데도 공을 놓지 않았다. 독립리그에서 현역 연장을 바라봤고 탬파베이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포기하지 않자 반전이 찾아왔다. 프로 입단 9년차에 구속이 향상됐다. 2021년. 4년 만에 다시 빅리그 마운드에 오른 엔스의 속구 평균 구속은 94.3마일(약 151.7㎞). 좌투수로서 빅리그 평균 이상의 구속을 자랑했다. 2021년 상황에 따라서는 멀티 이닝을 소화하는 중간 투수를 맡아 ML에서 9경기 22.1이닝을 소화했다. 이후 파워피처이자 선발 투수로서 엔스의 잠재력을 알아본 일본프로야구 세이부가 엔스를 영입했다.

성공 공식이 보였다. 150㎞를 웃도는 속구. 속구와 더불어 구속이 향상된 슬라이더에 이전부터 주무기였던 체인지업을 조합하면 에이스가 된다. 건강 이슈는 없다. 큰 부상 없이 마이너리그에서 꾸준히 로테이션을 돌았다. 빅리그는 아닐지 몰라도 아시아 무대에서 선발 투수로 대성할 확률이 높아 보였다.

그런데 좀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우타자 몸쪽을 파고드는 속구에 확실하게 브레이킹이 걸리는 체인지업을 구사하면 무수히 많은 삼진을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2022년 일본에서 엔스는 9이닝당 탈삼진 6.8개에 그쳤다. 10승 7패 평균자책점 2.94로 활약했지만 적은 탈삼진 숫자에는 물음표가 붙었다. 2023년에는 9이닝당 탈삼진이 5.0개로 더 하락했다. 1승 10패 평균자책점 5.17로 작년과 같은 투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부진했다. 그리고 LG 유니폼을 입었다.

단순히 공이 빠른 좌투수라고 LG가 엔스를 영입한 것은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만들지 못한 구종의 조화를 이룬다면 엔스가 예상했던 성공 공식을 이룰 것으로 내다봤다. 염경엽 감독이 엔스에게 전달한 첫 번째 과제도 체인지업이었다. 계약 후 염 감독은 엔스가 체인지업을 확실한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비시즌에도 연마할 것을 주문했다.

첫 불펜 피칭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지난 2일 캠프 초반부터 불펜 피칭에 임해 체인지업을 구사했다. 구단 공식 유튜브에 엔스의 체인지업이 고스란히 찍혔는데 절묘하게 공이 가라앉는 모습이었다. 150㎞ 속구와 체인지업. 2016년 LG의 대반전을 이끌었던 에이스 데이비드 허프의 투구 패턴과 같다.

엔스가 맡아야 할 역할도 다르지 않다. 1선발로서 로테이션 중심에 서는 것이다. 엔스는 “1선발 기회가 와서 흥분되고 기대된다”며 한국에서 기량을 만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넣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새로 만난 지도자, 동료와 꾸준히 의사소통할 것을 강조했다. “코치님들과 훈련하는 것이 기술 및 트레이닝에 큰 도움이 된다. 시즌 개막에 맞춰 준비하는 과정을 얘기할 때에도 서로 생각이 일치한다”고 말한 엔스다.

약 열흘 후면 실전이다. LG는 현지 시간 기준 오는 24일 청백전을 시작으로 오는 26일 NC전, 28일 청백전, 29일 다시 NC전을 치른다. 엔스가 앞으로 보여줄 모습도 이때 어느 정도 가늠이 될 것이다. bng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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