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註 : 50년 전인 1973년 6월, ‘선데이서울’의 지면을 장식한 연예계 화제와 이런저런 세상 풍속도를 돌아본다.

[스포츠서울] 1960~1970년대 코미디계는 별명의 시대였다. ‘막둥이’ 구봉서, ‘살살이’ 서영춘, ‘비실이’ 배삼룡, ‘땅딸이’ 이기동, 그리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뚱뚱이’ 양훈, ‘홀쭉이’ 양석천, ‘합죽이’ 김희갑 등 스타가 참 많았다.

팍팍한 삶에서 웃음을 갈구하는 대중의 욕구는 그 시대를 코미디 전성기로 만들었고 자연적으로 코미디 스타가 등장했다. 코미디언 이기동도 그 중 한 명이었고, ‘땅딸이’는 그의 키가 좀 작은 데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군 의장대처럼 절도 있는 특유의 걸음걸이, 익살스러운 표정, 가수를 뺨치는 노래 실력, 게다가 독창적인 유행어 창제(?) 능력까지 갖춘 이기동은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었다. TV와 라디오 무대를 종횡무진 누볐고, ‘남자 가정부’ ‘마음 약해서’ 등 몇 편의 영화에 주연으로도 출연했다. 그런가하면 ‘망각’ ‘빗속의 추억’ 등 가수로서 앨범도 내는 등 다재다능했다.

당시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MBC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키 큰 코미디언 권귀옥과 짝을 이뤄 ‘늘씬한 미녀 미스 권과 땅딸이 이기동’ 콤비로 활약했고, 이후 선배 코미디언 배삼룡과 ‘비실이 배삼룡과 땅딸이 이기동’ 으로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줬다.

하지만 이기동은 이래저래 사건사고가 따르는 트러블메이커이기도 했다. 당시 ‘선데이서울’은 수시로 그의 기행이나 말썽을 실었는데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작은 일 하나도 화제였고, 모두의 관심이었다.

그 중 하나가 ‘선데이서울’ 243호(1973년 6월10일)에 실린 여관비 체불(?) 사건이다. 1973년 5월, 이기동은 친구와 만나 술을 마셨고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라 술꾼들은 단속을 피해 종종 여관에 투숙했다.

다음 날 잠이 깨보니 지갑이 텅텅 비어 있었고, 여관비 1200원은 다음에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는 여관 주인이 내민 종이에 사인을 해줬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여관비는 감감무소식, 여관 주인이 이런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입방아에 올랐다.

그런데 이기동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친구에게 빨리 갚으라고 했는데 제때 처리하지 못했던 것뿐이고, 지불각서(?)에 해준 사인은 팬에게 하는 사인으로 알고 해줬다는 것. 전후 사정이 어찌 되었건 인기 코미디언이 얼마 되지도 않는 하룻밤 여관비를 제때 갚지 않아 기사화되는 코미디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선데이서울’ 245호(1973년 6월24일)에는 이기동이 DBS동아방송(현 SBS 러브FM)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이야기가 실렸다. 당시 이기동은 배삼룡과 함께 공개방송 프로그램 ‘명랑 스테이지’의 공동 MC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배삼룡이 지각을 자주 했던 모양이다. 이기동은 불만이 많았지만,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배삼룡을 잡아두려고 방송사는 칙사 대접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번에는 이기동이 1시간을 지각하자 PD가 싫은 소리를 좀 했을 것이다. 배삼룡과 차별대우에 화가 난 이기동은 즉흥 연기에서 대사를 빌려 막말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오늘 나 말이야. 어떤 XX 때문에 김이 샜단 말이야. 오늘로 쫑이야. 이러지 마.”

이기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윗선에 담당 PD를 교체해주지 않으면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결국 방송국은 PD 대신 진행자 이기동을 잘랐다. 오만방자한 행동에 괘씸죄를 물은 셈이다. 이어 DBS의 또 다른 프로그램 ‘가요 만화경’에서도 중도하차했다.

이렇듯 뛰어난 코미디언이었지만 삶 자체는 풍파의 연속이었다. 기인이기도 했다. 데뷔하기 전에는 부두 노동자, 지방극장 무명 가수로 지냈다. 전직 육군 장교였다는데 일찍 제대한 사연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높은 인기에 힘입어 1979년 식음료 사업에도 뛰어들었는데, 이 일이 이기동의 인생에서는 악재 중의 악재가 됐다. 이기동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의 별명을 딴 ‘땅딸사와’를 출시했지만, 생산이 늦어지며 대리점주들이 그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고 결국 구속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며 사회 분위기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신군부는 ‘사회정화’를 기치로 내걸어 방송출연금지 대상자를 발표했고, 이기동은 24명의 명단에 오르며 방송에서까지 퇴출됐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경제인’으로 찍혀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까지 끌려갔다.

그곳에서 끔찍한 고초를 겪은 이기동은 출소 후 술로 울분을 달랬고, 그러다 1987년3월 밤무대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다 스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52세. 벼락같은 인기와 쏜살같은 추락이었다. 그리고 흘러간 36년 세월에 우리는 그 이름, 석 자를 잊어가고 있다.

자유기고가 로마지지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