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회-파월개선장병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사진 가운데)이 1973년3월14일 수원기지로 개선 귀국한 주월 한국군 사령부 지휘부를 환영하고 있다. 스포츠서울DB

[스포츠서울] 1973년 ‘선데이서울’ 232호, 눈길을 끄는 사진 한 장이 실려 있었다. 바로 50년 전 이 사진이다.

‘주월사(駐越司) 지휘부 개선’ 1973년 3월 14일, 수원 기지로 개선 귀국하는 주월(베트남 주재) 한국군 사령부 지휘부를 환영나온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이세호 주월 한국군 사령관(왼쪽) 등 장병 가족들이 환하게 웃는 사진이다.

50년 전, 월남(베트남)에서 한국군 완전 철수 소식을 전하는 이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반만년 민족사에서 최초의 해외파병도 역사적이었지만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한 것도 역사적이었다. 그 자리에 대통령이 환영 마중을 나온 것이다.

60대 이상이라면 모두가 기억할 월남 파병, 국민소득 100달러도 되지 않던 가난한 시대에 우리 아들, 남편, 아버지들이 월남에서 8년 8개월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웠다. 나라 경제도 살리고 더 크게는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와 나라를 지킨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파병 효과는 실로 컸다.

장병의 전투 수당, 군수품 등 전쟁물자를 공급하면서 외화를 벌었고, 건설, 운송 등 현지 사업으로 벌어들인 달러가 들어오며 고속도로가 되고 공장과 다리 건설로 이어졌다. 이른바 월남 특수가 우리나라 경제부흥의 일대 전기가 된 셈이다.

상시 주둔 병력 5만 명, 연 병력 30만 명이 8년 8개월 동안 5만6000여 작전을 전개했다. 세월은 흘러 차츰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 기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다진 초석이었기 때문이다.

3월 14일 지휘부 귀국에 이어 20일에는 서울 운동장에서 범국민적 ‘파월 개선 장병 환영 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는 맹호, 백마, 청룡 등 전투부대는 물론, 비둘기, 십자성, 은마, 백구 등 지원부대 장병들이 국민에게 개선 귀국했음을 보고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233회-파월개선장병
1973년3월14일 수원기지로 개선 귀국한 주월 한국군 사령부 지휘부가 도열해있다. 스포츠서울DB

파병 당시 뒷이야기이다. 국익 최우선이라는 목표 아래 어떻게 하면 미국과 보다 유리한 파병 협상을 할 것인지를 두고 모든 지혜를 모았던 이야기가 남아있다.

2003년 5월 24일에 방송한 KBS1 ‘역사 스페셜-월남파병, 박정희의 승부수였다’에서는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고 유리한 파병 조건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꼭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야당이 파병에 찬성하는 바람에 반대 목소리가 사라지고 말았다.

유리한 협상카드를 놓칠까를 염려한 박정희 대통령이 여당에서 꽤 정치적 파워가 있는 측근으로 하여금 파병 반대를 들고 나오게 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정치적 쇼이자 연출이었던 셈이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길 없으나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다. 비사(秘史)였다.

또 하나의 뒷이야기. 이동외과 병원, 태권도 교관단, 건설공병단 등 비전투부대에 이어 1965년 7월,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한 대통령이 군 수뇌부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파병하는데 얼마 정도 준비 시간이 필요한가?” 라고 물었다는데 육군참모총장은 지원자 선발, 훈련 등 6개월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사실 그 정도 물리적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공정식 해병대 사령관은 대뜸 “저희는 중대급은 즉각 출동할 수 있고 대대급은 24시간, 연대급은 48시간, 사단급은 72시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호기 있게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전투부대로는 최초로 해병 청룡부대(여단)가 1965년 9월 20일 포항에서 결단식을 가진 후 월남으로 향했다. 이어서 맹호부대(사단)가 10월 12일 여의도에서 환송식을 가진 후 장도에 올랐다. 20여 일 차이로 해병대 청룡부대가 ‘최초’라는 타이틀을 차지했다.

청룡부대 결단식과 맹호부대 환송식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장병들의 무운을 기원했다. 그만큼 우리 역사에서 의미가 큰 파병이었다. 그 후 백마부대(사단)가 파병되어 한국군이 미군 다음으로 병력 규모가 컸고 또 가장 용맹했던 군대였음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총각레지
1973년 3월호에 실린 총각레지 기사. 스포츠서울DB

총각레지
1973년 3월호 선데이서울에 실린 총각레지 기사와 총각레지 미스터 리의 모습. 스포츠서울DB

◇다방에 등장한 총각 레지(?) 여성에 인기 폭발

살다 보면 무언가 다른 역발상에 환호하고 특별함에 박수 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50년 전, 대구의 한 다방에 등장한 총각 레지 이야기이다. ‘레지’는 다방 등에서 손님에게 차나 음료를 접대하는 종업원을 뜻하는 일본어로, 원문 기사에는 총각 레지로 되어있다. 요즘은 커피숍이나 찻집에서 남자, 총각의 서빙을 이상해하거나 어색해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50년 전, 그때는 달랐다.

커피나 차를 마시는 곳을 다방이라 했고 요즘의 커피숍과 비슷한 기능을 했다고 보면 된다. 다방은 약속의 장소였고 쉼터이기도 했다. 음악을 듣기 위해 가기도 했고 맞선을 보는 곳이기도 했다.

때로는 아가씨(레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들르기도 했다. 또 사무실이 없는 가난한 사장님(?)들은 다방 전화번호를 개인 연락처로 삼기도 했다. 그런 다방에서 차 시중이나 말벗은 언제나 여자 레지 차지였다.

그런데 ‘선데이서울’이 1973년 2월, 총각 레지가 있는 대구 도심의 한 다방이 아가씨 손님들로부터 인기 폭발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이를 기사화했다. ‘여대생 인기 끄는 총각 레지 미스테리’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꾸냥(중국어로 ’아가씨‘를 뜻하는 말)’저고리에 화려한 무늬의 ‘판탈롱(나팔바지)’을 받쳐입고 여자용 샌들을 신었다”고 총각 레지의 옷차림을 소개했다.

남자지만 여자 복색을 했던 셈이다. 매끈한 얼굴이 ‘시스터 보이’형이라고 총각 레지의 외모도 언급했다. 여자처럼 보이는 총각이란 의미일 듯하다. 그 다방에는 아가씨 레지도 몇 명이 있었지만 딱 한 명인 이 총각 레지의 등장으로 다방 분위기가 확 바뀐 데다 매상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총각 레지가 아가씨 손님들에게 어느 정도 인기였냐 하면 조금이라도 그와 더 이야기하려고 마냥 붙들고 있는가 하면 너도나도 차(茶)를 사주는 바람에 하루 수십 잔을 마시는 고역도 치렀다고 했다. 거기에다 데이트 신청도 많았다고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른 다방에서도 너도나도 총각 레지 고용을 서둘렀지만 시스터 보이형 총각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고 했다. 월 2만5000원이라는 비교적 후한 보수에다 숙식 제공이라는 조건까지 취재해 실었다.

50년 전만 해도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만큼 남녀 교제가 자유롭지 못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고 관심도 꾹꾹 누르고는 살았다. 그렇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굳이 내숭 떨 일도 없이 자연스럽게 총각을 만날 수 있었으니 여성들에게는 인기 폭발이었을 것이다.

아가씨들만의 세계였던 다방 레지 영역에 총각의 등장은 파격이었고 역발상이었다. 살아온 한 시대의 풍속도다.

자유기고가 로마지지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