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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 시절 차범근(가운데) 전 감독. 그리고 31년 만에 차 전 감독의 아시아 빅리그 통산 최다골 신기록을 경신, 100골째를 채운 토트넘 손흥민(오른쪽). 스포츠서울DB

[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2% 모자랐던 차붐의 꿈을 채우기까지 31년, 일수로는 1만1433일이 걸렸다. 꿈을 현실화한 건 ‘차붐의 진정한 후예’로 불린 월드스타 손흥민(28·토트넘)이다.

‘기록의 사나이’ 손흥민이 또 한 번 아시아 유럽파 새 역사를 갈아치웠다. 그는 5일(이하 한국시간) 영국 맨체스터 올드 드래포드에서 열린 2020~2021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4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와 원정 경기에 왼쪽 측면 공격수로 선발 출격, 전반에만 2골1도움 ‘원맨쇼’를 펼치며 6-1 대승을 이끌었다. 올 시즌 전 대회 통틀어 시즌 6~7호 골이자 세 번째 도움. EPL로 국한하면 5~6호 골과 첫 도움을 해냈다. 공식전 단 6경기(EPL 4경기·유로파리그 2경기)만에 두자릿수 공격 포인트(7골3도움)를 채운 것이다. 이날 멀티골로 손흥민은 유럽 커리어 11시즌 만에 아시아 선수 최초로 ‘빅리그(정규리그) 통산 100골’을 채웠다. 종전까지는 지난 1978~1989년 당대 최고 리그인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갈색폭격기’로 명성을 떨친 차범근 전 수원 감독이 세운 98골이 아시아인 빅리그 통산 최다골이었다.

손흥민100골
그래픽 | 황철훈기자

만 18세이던 지난 2010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프로로 데뷔한 손흥민은 레버쿠젠을 거치며 5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뛰며 통산 135경기 41골을 넣었다. 그리고 2015년 여름 토트넘에 입성한 뒤 지난 시즌까지 EPL에서 53골을 기록, 유럽 정규리그 통산 94골에 도달했다. 마침내 지난달 20일 사우샘프턴전에서 4골을 몰아넣으며 차 전 감독과 통산 최다골 타이기록을 쓴 그는 맨유 원정에서 기념비적인 100골 신화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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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 손흥민이 맨유 원정 경기에서 전반 역전골을 터뜨린 뒤 골을 도운 해리 케인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있다. 맨체스터 | 로이터연합뉴스

차범근
1980년대 레버쿠젠 시절 차범근의 모습. 스포츠서울DB

‘빅리그 100골’은 과거 차붐 신화도 닿지 못한 대기록이다. 차 전 감독은 레버쿠젠 소속으로 빅리그 마지막 시즌이었던 1988~1989시즌을 앞두고 통산 279경기 95골을 기록 중이었다. 새 시즌을 앞두고 당시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서 “분데스리가 100골 고지를 점령하겠다”면서 빅리거로 자신의 마지막 목표를 밝힌 적이 있다. 그전까지 유럽축구연맹(UEFA)컵만 두 번이나 우승을 차지하는 등 화려한 시절을 보낸 그에게 마지막 미션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꿈을 가로막은 건 부상 변수였다. 마지막 시즌 전반기 2골(통산 96~97호 골)을 넣은 그는 1989년 1월 리그 휴식기에 치른 평가전에서 갈비뼈를 다쳐 전열에서 이탈했다. 어렵게 팀에 복귀해 그해 3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통산 98호 골을 넣으며 100골을 눈앞에 뒀지만 이후 함부르크 원정에서 또다시 상대 견제에 시달리다가 정강이 부상으로 쓰러졌다. 결국 11경기째 침묵한 그는 6월17일 카이저스 라우테른과 분데스리가 고별전에서도 아쉽게 골 맛을 보지 못했다. 통산 308경기 98골이었다.

차 전 감독은 선수 은퇴 후에도 간간이 빅리그 100골에 2골이 모자랐던 ‘2% 아쉬운 추억’을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빅리그에서 10년 이상 뛰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1998년 전까지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역대 최다골로 오랜 기간 유지됐다. 98골 모두 필드골일 정도로 순도도 높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빅리그에서 더는 아시아 선수가 차붐의 기록을 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가 고별전을 치른 이후 31년이 지나 가장 아끼는 후배이자 후계자인 손흥민이 100골의 꿈을 대신 이뤘다.

[포토] 차범근, 손흥민이 대견스럽습니다~!
손흥민(왼쪽)과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이 지난 2018년 5월21일 서울광장에서 진행된 대한민국 2018 러시아 월드컵 축구대표팀 출정식에 참석해 나란히 서 있다. 김도훈기자

상대가 맨유여서 손흥민에겐 더욱더 감회가 새롭다. 맨유는 손흥민에게 어린 시절부터 커다란 꿈을 안긴 동경의 팀이다. 또다른 롤모델인 박지성이 지난 2005~2012년 맨유 붉은 유니폼을 입고 뛸 때 밤을 지새우며 TV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먼 훗날 박지성 선배처럼 EPL 무대에 뛰겠다는 의지로 땀을 흘렸다. 마침내 유럽 무대에 선 그는 분데스리가 시절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포함해 EPL 무대까지 맨유를 상대했는데 이상하리만큼 재미를 못 봤다. 아스널, 첼시 등 다른 빅클럽을 상대로는 득점포를 가동했지만 맨유를 상대로는 이전까지 11경기 무득점이었다. 절치부심한 그는 마침내 2020년, 그것도 맨유의 심장인 올드 트래포드에서 통산 100골로 이어지는 멀티골로 고대하던 골 맛을 보는 데 성공했다. ‘차붐 신화’를 넘어 ‘손흥민 신화’가 올드 트래포드를 찍고 새롭게 쓰이고 있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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