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101010008371

[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문화 예술정책에서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강조해 호평을 받은 적이 있다. 지난 2월 20일 청와대 오찬 모임에서다. 당시 문 대통령은 제92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제작진과 출연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팔길이 원칙’을 거론하며 예술의 자율성을 누차 피력한 바 있다. 지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봉 감독을 다분히 의식한 발언이었는지 몰라도 여하튼 ‘지원을 하되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뜻의 ‘팔길이 원칙’에 대한 대통령의 신념은 확고해 보였다.

그렇다면 광의의 문화 콘텐츠의 하나로 인식되는 체육은 ‘팔길이 원칙’에서 예외일 수 있을까. 작금의 체육 현실은 분명 그렇지 않아 보인다. 체육을 규제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실상의 새로운 ‘관치체육’의 거칠고 사나운 움직임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문화체육관광부 박양우 장관이 직접 나서 “대한체육회의 공공성과 책임성 회복을 위해 KOC(대한올림픽위원회)를 분리하겠다”고 밝히며 KOC 분리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체육 현장의 목소리에는 애써 귀를 닫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공공 지원사업,즉 문화 예술 체육 분야의 자율성 가치를 높이 사며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는데도 유독 문체부는 체육에 관해서는 딴 맘을 먹고 있는 듯하다. 체육계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체부가 KOC 분리를 시도하겠다는 건 ‘팔길이 원칙’을 강조한 대통령의 신념과 정면 배치되는 처사인 것 같다. 하기야 문화·예술계는 문체부가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상대는 아니다. 블랙리스트 사건 때 모두가 한데로 똘똘 뭉쳐 문체부에 가장 조직적으로 대응했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문체부의 부역혐의를 철저하게 밝혀내며 관련자 처벌까지 당당하게 요구했던 게 바로 문화·예술계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체육은 그렇지 못했다. 문체부의 부역혐의를 가려내고 밝혀내기는커녕 무엇이 그리 급한지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그냥 넘어가기에 바빴다. 그게 부메랑이 될 줄은 몰랐다. 문체부가 체육계를 향해 KOC 분리 카드로 압박하며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도 체육계가 힘을 합쳐 지난 정권에서 문체부의 과오를 명확하게 짚어내고 매조지하지 못한 탓이 크다.

그렇다고 지금의 체육현실을 옹호하거나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만연된 부정과 부패 그리고 반인권적 행태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으로 중단없는 개혁에 나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대정신에 떨어지고 시민사회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국내 체육계의 제반 문제점을 그냥 덮고 가서는 한국 체육의 미래가 없다. 다만 문제 해결 방식은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위로부터의 강제가 아니라 체육계 스스로가 주체의 각성을 통해 개혁작업에 돌입해야 개혁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게 필자의 확신이다. 정치와 관 주도의 체육개혁은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꼬일대로 꼬여있는 체육의 특성상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KOC 분리를 통한 개혁은 논리도 빈약할 뿐더러 자칫 지원이 아닌 간섭으로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부는 명심했으면 좋겠다.

천사와 악마는 백지 한 장 차다. 공공정책에서 좋은 결과를 이끄는 게 천사의 손이라면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불러 일으키는 건 바로 악마의 손일 게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 절묘한 선은 딱 팔길이 만큼이다. 그 선은 참으로 지키기 힘들며 그 선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게 바로 정책의 성공미학이다. 팔 길이 보다 짧아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게 되면 그건 악마의 손길에 다름 아니다. 체육에서 지원이 아닌 간섭을 일삼는 문체부의 손이 악마의 손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천사의 손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편집국장 jhkoh@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