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LG 박용택,
LG 박용택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잠실=스포츠서울 윤세호기자] 한·일월드컵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2002년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은 대졸 신인은 KBO리그 데뷔 시즌에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당시 열린 가을잔치를 모두 경험한 뒤 “조금만 더 하면 우승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덧 은퇴 시즌을 앞두고 있는 박용택(41·LG)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타석에 서보지 못했다. 그는 경자년(庚子年) 새 해를 맞아 스포츠서울과 가진 신년특집 인터뷰에서 “우승만 할 수 있다면 한 시즌 동안 안타 10개만 쳐도 괜찮다”는 말로 간절함을 대신했다. LG가 창단한 1990년에 야구를 시작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는데 “창단 30주년에 은퇴경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장식하는 영화를 연출하는 게 야구인생 최대 목표”라고 강조했다. KBO리그 개인통산 최다안타 1위(2439개)도, 타격왕(0.372, 2009년) 득점왕(90점) 도루왕(43개, 이상 2005년) 타이틀도 한국시리즈 우승 기쁨보다 덜할 것이라는 게 박용택의 생각이다.

박용택
신인 시절 일본 오키나와 캠프에서 샌드백을 치고 있는 LG 박용택. (스포츠서울 DB)

◇“10안타면 어때” 선수 30주년 피날레는 우승

고명초등학교 재학시절인 1990년 6월 3일은 ‘선수 박용택’이 데뷔한 날이다. 고교(휘문고) 졸업반이던 1997년 1차 연고 우선지명으로 LG행을 확정한 뒤 고려대 부동의 1번타자를 거쳐 LG에 입단할 때까지만 해도 불혹이 넘도록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못해볼줄 꿈에도 몰랐다. 그는 “지난해 계약 후 개인기록 욕심은 완전히 지웠다. 숫자 생각은 제로(0)나 마찬가지다. 이제는 내가 안타 몇 개를 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승멤버가 될 수만 있다면 시즌 내 안타 10개만 쳐도 좋다”고 말했다.

묻어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지난해 공인구 반발계수 감소 효과를 절감한 뒤 생존법을 터득했다. 박용택은 “지난해 초반 인천 SK행복드림구장과 창원 NC다이노스파크에서 경기를 할 때 넘어가야 할 타구가 펜스 앞에서 잡히더라. 공인구 효과를 제대로 체험한 셈”이라고 돌아봤다. 이 무렵 부상해 재활군으로 내려간 건 천운이었다. 체중감량과 함께 정확성 강화에 열중할 시간을 벌었다. 박용택은 “바뀐 공인구에 초점을 맞춰 타격 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는 정규시즌 후반기 타율 0.380, 출루율 0.404로 ‘회춘택’ 별칭을 얻었다. 타격이론과 실전에 관해 둘째가라면 서러운 공부벌레라 콘텍트 능력을 향상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말로는 “시즌 10안타도 괜찮다”고 했지만 후배들과 경쟁에서 이길 자신 없이 선뜻 우승을 목표로 삼기 어렵다.

[SS포토]야구올스타 김성근, 2-4까지 따라붙었어
나눔 올스타의 김성근(왼쪽) 코치가 18일 수원 케이티위즈파크에서 열린 ‘2015 KBO리그 올스타전’ 드림 올스타와 경기 7회말에 마운드에 올라온 박종훈을 상대로 우월 솔로 홈런을 날린 박용택을 축하해주고 있다. (스포츠서울 DB)

◇김성근 김용달 지금의 ‘타격택’ 만든 은사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지난해까지 25년간 무관에 그친 팀 답게 숱한 지도자가 거쳐갔다. 그 세월을 박용택도 고스란히 함께 했다. 스스로도 “수 많은 지도자를 만나 타격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내 타격이론을 적립했다”고 말했다. 박용택과 타격에 관한 얘기를 나누면 밤을 샐 정도로 해박한 이론과 사례를 들을 수 있다.

이론을 흡수해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면 기초가 탄탄해야 한다. 박용택은 자신의 기초를 닦아준 은사로 김성근 소프트뱅크 고문과 김용달 삼성 타격코치를 첫 손에 꼽았다. 그는 “신인 때 김성근 감독님을 만는 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 학창시절에는 프로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적당히 훈련하고 돈 받는게 프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입단 직후 마무리 캠프 첫 날, 내 선입견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웃었다. 김 감독의 훈련량은 예나 지금이나 많기로 유명하다. 당시에는 50대로 비교적 젊을 때라 강도가 훨씬 셌다. 박용택은 “감독님께서 프로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깨뜨려 주셨다. 신인 때 감독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적당히 야구하다 금방 사라지는 선수가 됐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프로야구 2009 LG-삼성
지난 2009년 6월 2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더블헤더 1차전에서 3안타 맹타로 승리를 끈 박용택(오른쪽)이 김용달 코치와 하이파이브 하며 지나가고 있다. (스포츠서울 DB)

프로 선수의 기초를 닦은 뒤 정상급 타자로 발돋움하는 과정에는 김용달 코치의 도움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는 “2008년까지 난 ‘노망주’였다. 김 코치님과 2년 간 거의 매일 싸우면서도 밤을 새며 스윙 훈련을 했다. 함께 땀을 흘리면서 서로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만 서른이 되던 2009년 ‘노망주’ 껍질을 깨고 타격왕을 차지했다”고 돌아봤다. 도루왕 이대형, 난세의 영웅 안치용, 프리에이전트(FA)로 합류한 이진영 등 쟁쟁한 외야진을 뚫고 타격왕에 오른 뒤 10연속시즌 세 자릿수 안타를 뽑아내며 경지에 올랐다. 그는 “김 코치님과 긴시간 함께 고민하면서 해답을 찾아 경쟁이 두렵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프로야구 2009 LG-한화
LG의 박용택(가운데)과 이대영(오른쪽)이 2009년 잠실 한화전을 10-4로 승리한 뒤 기분좋은 얼굴로 마운드로 걸어오고 있다. (스포츠서울DB)

◇경쟁? 계약금 분할지급도 돌파했던 나

따지고보면 박용택은 늘 경쟁 속에 한 단계 성장했다. 데뷔시즌 전대 미문의 ‘계약금 분할지급’ 방침까지 실력으로 이겨냈다. 당시 LG는 박용택에게 지급한 입단 계약금을 마무리캠프에서 기량을 확인한 후 지급하겠다는 황당한 제안을 했다. 하필 이 때 사령탑이 김성근 감독이니 대졸 신인이 버텨낼 것으로 기대한 이가 많지 않았다. 편견과 한계를 동시에 깨고 주전으로 도약한 뒤 18년이 지났지만 올해도 김현수 채은성 이형종 이천웅 등 전성기에 접어든 후배들과 경쟁을 앞두고 있다. 그는 “프로는 경쟁이다. 시범경기에서 미친듯이 때려내는 타자를 개막 엔트리에 제외할 감독이 있겠는가”라는 말로 초반부터 전력질주하겠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포토] LG 박용택,
LG 박용택이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있다. 김도훈기자 dica@sportsseoul.com

박용택은 “마지막 시즌은 내게 주어진 타석이 600번일 수도 100번일 수도 있다. 나는 다음이 없다. 내 자리에 불평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주어진 임무를 100% 소화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임무 중 꼭 이루고 싶은 게 은퇴경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장식하는 일이다. 그는 “올해는 분위기가 다르다. 의례적으로 우승을 목표로 삼는게 아니라 ‘우승을 해야한다’는 마음이 모여있다. 느낌도 좋고, 자신도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bng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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