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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스포츠는 땀의 응축이다. 그것도 맘만 먹는다고 금세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인고(忍苦)의 세월을 거쳐야 결실을 맛보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그래서인지 체육에선 멀리 내다보는 정책적 안목이 필수적이다. 정책 변화에서도 심모원려(沈謀遠慮)의 자세가 필요하다. 정책 변화를 결정하게 된 진단이 객관성을 상실하거나 과잉 신념이나 편향된 정치적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면 십중팔구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정책변화를 단행할 때 돌 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신중함을 기해야 하는 이유다.

시나브로 한국 체육지형에 불편한 균열이 시작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2020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전통적인 효자종목들이 약속이나 한듯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올림픽 한 해 전에 열리는 각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는 올림픽 전초전이라 불릴 만큼 중요하다. 올림픽 출전티켓이 걸려 있는 걸 떠나 이 대회 성적이 곧 올림픽 성적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막을 내린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죽을 쒔다. 유도는 노골드에 은메달 1개,동메달 1개에 그쳐 빨간불이 커졌고,레슬링은 노메달의 수모까지 겪었다. 배드민턴도 단식 5명,복식 4개팀이 출전했지만 노메달에 그쳤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세계 최강 양궁의 추락이다. 2016리우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를 휩쓸었던 양궁은 개인과 단체전에서 32년만에 노골드에 그쳐 체면을 구겼다. 그나마 혼성팀이 유일하게 금메달을 따내 위안을 삼았지만 양궁에 켜진 빨간불은 한국의 체육지형에 감지된 불편한 균열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됐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전통적 강세종목들의 세계선수권대회 동반 부진은 정부의 체육정책 실패와 혼선이 야기한 재앙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3년 전 단행된 체육단체 통합이후 체육계는 봇물처럼 쏟아지는 체육정책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체육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채 엘리트체육의 폐해만 도드라지게 부각시키는 편향된 시각은 균형잡힌 체육 발전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주체의 각성을 통한 체육계 스스로의 강도높은 개혁이 미흡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주도하는 톱 다운 방식의 체육정책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국제 경쟁력으로 대변되는 엘리트체육의 가치마저 부정하는 건 균형감각을 상실한 정책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결과 엘리트체육의 동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그 여파가 고스란히 체육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게 공통된 견해다. 스포츠는 늘 그렇듯 활기가 넘쳐야 하며 객관적 전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정신적 힘,즉 사기가 충만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전력을 구성하는 물리적 총합을 뛰어넘는 힘을 케미스트리(chemistry)라 부르는데 이는 스포츠세계에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덕목이다. 왜 하늘을 찔러야 할 사기가 바닥을 치며 화학적 결합에서 뿜어져 나와야 하는 뜨거운 에너지가 체육현장에서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 이유는 애오라지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인 듯싶다.

“국민들이 올림픽 금메달을 원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망발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과 이에 동조하며 체육계를 큰 충격에 빠뜨린 전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철학없는 레토릭이 더해지며 체육계는 혼란에 빠졌다. 다행히 박양우 장관이 부임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엘리트체육의 가치 역시 중요하다며 수습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이후 봇물처럼 이어지고 있는 정책의 흐름 역시 엘리트체육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통에 체육계의 분위기는 침통하다.

체육의 국제 경쟁력을 폄훼하고 이를 고취하기 위한 노력을 압축성장시대의 국가스포츠주의(state amateurism)의 낡은 패러다임속으로 강제하는 태도는 체육에 대한 무지와 철학의 부재를 드러내는 좋은 본보기다. 체육의 본질적 가치 중 하나는 경쟁이며 이를 통한 국가간 경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 체육계에 휘몰아치고 있는 광풍은 엘리트체육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평가절하이며 이는 체육개혁의 본질과도 거리가 멀다. 엘리트체육과 생애체육의 가치는 결코 충돌하는 게 아니라 상생할 수 있는 그런 가치다. 그동안 한국 체육을 지배했던 엘리트체육에 대한 어두운 면은 누가 뭐래도 반드시 고쳐야 한다. 인권 등 다양한 가치가 오로지 성적을 내기 위해 사장되고 무시됐던 과거의 성적지상주의 패러다임은 체육선진화를 꿈꾸는 지금의 시대에선 지양돼야겠지만 한국 체육의 국제 경쟁력 또한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소중한 가치다. 한국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무대에 나가 판판이 나가떨어진다면 국민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국민들이 가장 속상해할 게다. 그들이 싫어하는 건 낡은 유물로 전락한 성적지상주의지 한국 스포츠의 국제 경쟁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체육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빚은 정책적 혼선은 이 참에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힘들게 쌓아올린 탑이 무너지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편집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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