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환
홍수환 KBC 회장이 스포츠서울과 인터뷰를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용수기자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1974년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챔피언 결정전이 펼쳐진 남아프리카 공화국. 비행기를 여섯번이나 갈아타야 갈 수 있는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홍수환(69)의 승전보는 온국민을 열광시켰다. 아들의 낭보에 “대한민국 만세다”라고 답한 모자간의 대화는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되었다. 유신독재 시절 온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쾌거가 됐고 한국 복싱 신화의 서막을 열었다.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인 홍수환은 다같이 어렵던 그 시절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했다.

국민적 사랑을 받던 복싱의 영광이 빛을 잃어가는데는 채 반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꾸준히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 아마추어 복싱과 달리 현재 프로 복싱은 산업의 쇠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업이 어려워지면서 오히려 힘을 모야야할 관련 단체들도 쪼개져 더욱 어려워진 상황. 홍 회장은 이런 상황에서 한국 프로복싱 73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권투위원회(KBC)의 회장을 맡고 있다. 어깨가 무거운 자리다.

KBC는 WBA와 일본복싱위원회(JBC)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단체로 국내에 유일하다. 이 때문에 국내 타 단체 역시 KBC의 허가를 얻어 일본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홍 회장은 지난 2014년 7월 경기인 출신 최초로 KBC 회장직에 올랐으나 잡음이 많았다. 내부 갈등으로 복싱인들이 갈라서기도 했다. 2016년에는 KBC를 개인회사처럼 운영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의혹은 대부분 해소됐지만 홍 회장은 이 때부터 회장직을 내려놓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후임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 결국 4년째 공석인 회장 자리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다.

홍수환

◇73년 전통의 역사와는 다른 한국 복싱의 현실

한국 프로 복싱은 현재 홍수환 회장이 활약하던 시기와 다른 현실에 직면해 있다. 프로복싱으로 성공은 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해외의 경우 프로복싱이 1국가 1단체의 원칙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국내는 이같은 규정이 없어 복싱 관련 복수의 단체가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홍 회장은 “KBC는 80년여 역사를 지닌 한국 복싱의 대들보다. 김기수 선배부터 지인진까지 44명의 챔피언을 배출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맏형으로서 프로 복싱의 힘을 제대로 모으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홍 회장은 “대한민국 복싱이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된다. 난 지금이라도 회장직을 내려 놓을 수 있다”며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가장 큰 문제는 재원이다. 현재 대한체육회 소속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건 아마추어 복싱인 대한복싱협회다.

애초부터 국가의 지원이 없던 프로 복싱은 산업의 몰락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홍 회장은 “아마추어 복싱은 전국체전에서 우승 한 번 하면 수천만원이 나온다. 그렇다면 누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넘어오려 하겠는가. 복싱 챔피언이었던 김기수 선배나 나도 돈을 벌기 위해 아마에서 프로로 전향한 것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재정적으로 열악한 상황 때문에 대한복싱협회와 통합을 원하는 상황이지만 이 마저 여의치 않다. 맛집에 비유하며 프로 복싱의 성장 필요성을 설명한 홍 회장은 “맛집이 있고 옆에 경쟁 가게가 생기면 상권이 형성되면서 장사가 더 잘되기 마련이다. 프로 복싱도 아마 복싱 만큼의 지원을 받는다면 한국 복싱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수환 회장은 “70년대 한국이 어려울 때 프로레슬링이 김일의 박치기, 프로 복싱이 홍수환의 4전 5기 등으로 국위선양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도와주는 이가 없다. 얼마 전에는 청와대에 가서 ‘비빌 언덕 좀 만들어달라’고 했다. 비빌 언덕이 있다면 프로 복싱은 흩어지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수환
현역 시절 홍수환. (스포츠서울DB)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대기만성형’이었던 홍수환

‘4전 5기’ 신화의 홍수환 회장도 처음부터 복싱을 잘하는 건 아니었다. 프로통산 전적 50전 41승 14KO 4무 5패의 업적에도 그의 아마추어 전적은 2전 2패. 1969년 프로로 전향해서도 그가 첫 승을 올리기까지 1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홍 회장은 “나는 대기만성형이었다. 김준호 선생 밑에서 연습하며 실력을 다졌다. 처음에는 실력이 잘 늘지 않았다. 첫 승을 올리기 전까지 권투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봐도 된다. 첫 승을 올린 뒤에는 권투를 알게 되면서 계속 이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홍 회장의 스승 김준호 트레이너는 제자에게 움직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홍 회장은 당시에 관해 “선생님이 항상 그랬다 ‘수환아 쟤 권투 잘하지? 쟤는 감이 좋은 거야’라고 말하셨다. 피하는 본능적인 감각이 좋다는 소리였다. 이 때문에 경기 중 눈도 감아보고 감을 살렸다. 그 뒤부터 상대가 들어올 것 같으면 먼저 때리기 시작하니 급성장했다”고 떠올렸다.

무엇보다 홍 회장이 대기만성형이었던 건 그가 기본기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복싱의 기본인 원, 투에 집중했던 만큼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원, 투였다. 천천히 기본기를 다졌기에 감을 찾은 홍 회장은 급성장 할 수 있었다.

홍수환
세계챔피언에 오른 뒤 금의환향 한 홍수환(가운데). (스포츠서울DB)

◇WBA 밴텀급 챔피언 될 수밖에 없던 배경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경기 소감을 말한 경기는 1974년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故 아놀드 테일러와의 WBA 밴텀급 세계챔피언 타이틀 매치였다. 당시 홍수환 회장은 비행편이 마땅치 않은 상황 속에 어렵사리 먼 타국에 도착해 경기를 준비했다. 상대에 대한 정보도 전무했다. 하지만 그날 하늘은 홍 회장을 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故 아놀드 테일러의 트레이너가 경기를 준비 중인 홍 회장을 찾아와 상대를 공략할 팁을 알려준 것.

홍 회장은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물론 우리 작전도 계속 움직이는 것이긴 했지만 스트레이트가 좋은 상대의 특징을 몰랐다. 보통 스트레이트가 정석으로 나간다면 상대는 어정쩡할 때 나온다는 얘기였다. 당시 상대 트레이너는 ‘네가 움직이면 네가 이길 수 있다’고 했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무턱대고 상대 트레이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홍 회장은 “왜 그러냐니깐 자기가 키웠는데 트레이너를 바꾼 앙심에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이게 얼마나 큰 운이냐. 내겐 복이었다. 경기 전 조언은 내게 큰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홍 회장이 이날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는데는 다른 요소도 작용했다. 당시 남아공은 홍 회장 일행도 어렵게 갈 정도로 국내에서 가기 힘든 곳이었다. 한국인의 응원은 바라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링 주변 한 쪽 구석에는 20여명의 한국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었다. 외항선을 타고 먼 타지에 나갔던 대한 건아들이었다.

홍 회장은 “그때는 원양어선 선원들 덕분에 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그마한 태극기를 들고 열정적으로 응원하는데 내겐 응원 목소리 하나, 하나 힘이 됐다. 보통 경기 종료 30초가 남으면 마지막 대시를 한다. 이때 되면 힘이 다 떨어져서 악으로 해야 되는데 당시 선원들의 응원 덕분에 더욱 힘내서 아놀드 테일러를 때려 눕힐 수 있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당시 경기에 들어가면서 나를 응원해주는 선원들을 위해 김준호 선생에게 ’선생님, 내가 오늘 죽어도 타월을 던지지 말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숨은 이야기 뒤 홍 회장은 우리에게 알려진 이야기처럼 어머니와 통화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홍수환
현역 시절 홍수환. (스포츠서울DB)

◇‘4전 5기’ 홍수환 “사실, 짜식이 건방져서 이겼어”

흔히 한국인의 끈기를 표현할 때 홍수환의 ‘4전 5기’를 사용한다.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난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기에 우리 국민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무는 것이다. 홍 회장의 신화는 1977년 11월 파나마의 수도 파마나시티에서 열렸던 WBA 주니어 페더급 초대 챔피언을 가리는 헥토르 카라스키야(59)와의 경기에서 탄생했다. 사실 홍 회장이 한 라운드에 4번 쓰러져도 5번 일어날 수 있던 건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당시 홍 회장의 상대 카라스키야는 열 살 아래의 막냇동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카라스키야는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도발했다. 홍 회장은 “얘기는 겸손하게 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노친네 네가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 내가 살살해줄게’를 말하고 있었다. 당시 기자들 역시 기관총으로 탱크를 쏘는 격이라고 기사를 썼다. 그런 부분이 나를 더욱 열심히 준비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건방진 상대와 저평가하는 언론이 홍 회장의 동기부여가 됐던 것이다.

사실 ‘4전 5기’라는 말도 경기 전 규칙 개정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3회 다운되면 자동 KO(Knock Out)되는 룰이었다. 홍 회장은 “당시 룰도 무제한으로 바뀌면서 내가 이길 수 있었다”면서 “수차례 다운되도 일어날 수 있던 건 모두 연습 덕분이었다. 연습이 스승이다. 연습을 많이 하면 다리가 불끈불끈 일어나고 마비가 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홍수환

◇스승 김준호 같은 지도자 되는 게 남은 꿈인 홍수환

어린 시절 앞집으로 이사 온 스승 김준호 덕분에 복싱을 시작한 홍수환 회장은 스승과 같은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프로 복싱의 처한 현실을 먼저 걱정한 홍 회장은 “프로 복싱은 직업이지 않느냐. 직업전문학교에서도 권투를 키우려 한다. 복싱과를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게 내 마지막 꿈”이라며 “선수를 키우면서 선수 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스승 김준호의 말을 떠올리며 이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설명한 홍 회장은 “내가 어릴 때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 있다. ‘너 권투 선수가 얼마나 행복한 직업인지 아느냐. 너 기껏 해봐야 2시간 운동하지?’라고 말한 적 있다. 하루 2시간 일하는 직업이 어딨느냐. 남는 시간 기술을 배워 놓으면 세계챔피언을 못해도 다른 직업으로 먹고 살 수 있다. 그래서 복싱 선수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칠순을 앞둔 홍 회장은 여전히 젊은 사람 못지 않게 경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방송 활동부터 강연까지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는 “나는 좋은 사례를 만들기 위해 내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복싱 선수도 말년에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들어야 좋게 볼 것 아니냐. 그래서 열심히 살고 있다. 할 일이 없으면 늙는 것이다. 바쁘면 늙지도 못한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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