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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스포츠서울 한지훈통신원·김현기기자]2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종료 휘슬이 울리자 손흥민은 그라운드에 누워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야 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벨기에전에서 0-1로 패해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됐을 때나, 2016년 리우 올림픽 8강에서 온두라스에 져 메달 획득이 무산됐을 때처럼 펑펑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가엔 눈물이 촉촉하게 맺혀 있었다.
그는 리버풀 엠블럼이 그려진 우승 단상 바로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감정을 다스렸다. 메달 시상식에도 맨 나중에 입장했다. 그의 눈은 살짝 부어있었다. 토트넘 동료들은 물론 승자인 리버풀의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까지도 손흥민을 위로하기에 바빴다. 이날 페널티킥 선제 결승포를 쏘아올린 이집트 공격수 모하메드 살라가 손흥민에게 다가가 그를 격려했다. 리버풀을 지휘하는 위르겐 클롭 감독은 손흥민을 꼭 껴안았다. 손흥민은 지난 2008년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와 레버쿠젠에서 2015년까지 생활했다. 독일이 제2의 고향이나 다름 없는데 마침 클롭 감독이 독일인이다. 클롭 감독은 결승전 전날 기자회견에서 느닷 없이 손흥민 얘기를 꺼내더니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뛰었으나 한국인이다. 독일인처럼 독일어를 잘한다. 군대를 갈 뻔했다”고 말해 딱딱했던 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빠트렸다. 클롭 감독의 손흥민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 발언이다.
손흥민은 이날 약속이나 한 듯 부진했던 토트넘 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발휘했다. 결승전 직전까지 선발 라인업 포함 여부가 불투명할 정도였으나 토트넘을 이끄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은 손흥민이 16강 도르트문트전, 8강 맨체스터 시티(맨시티)전을 통틀어 4골이나 쏘아 올렸던 기억을 떠올려 그를 왼쪽 공격수로 세웠다. 손흥민도 토트넘 입단 2~3년 전부터 자신을 추적했던 포체티노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토트넘은 ‘게겐 프레싱’으로 불리는 클롭 감독 특유의 압박 전술에 경기를 좀처럼 풀어가지 못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프레싱에 토트넘 수비수들부터 당황했다. 결국 손흥민의 스피드를 이용한 선굵은 플레이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손흥민은 전반 20분 크리스티안 에릭센의 침투패스 때 총알처럼 달려나가 볼을 잡았다. 상대 수비수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에 막혔으나 전반 이른 선제골 뒤 기세등등하던 리버풀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후반 35분 그의 슛은 얼마 뒤 에릭센의 프리킥과 함께 이날 토트넘 최고의 찬스였다. 손흥민은 아크 정면에서 공간이 생기자 특유의 묵직한 중거리슛을 오른발로 찼다. 리버풀 골키퍼 알리송이 깜짝 놀라 쳐냈으나 6만 관중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플레이였다.
손흥민에 대한 찬사와 호평도 이어졌다. 세계적인 지도자인 아르센 벵거 전 아스널 감독은 텔레비전 중계 패널로 등장해 “(토트넘에선)오직 손흥민만 위협적이었다. 특히 (리버풀 측면 수비수)알렉산더-아놀드의 뒷공간을 파고들 때 위협적이었다”며 그의 침투 능력를 극찬했다. 축구 관련 통계사이트 ‘후스코어드닷컴’은 손흥민에게 6.6점을 매겨 토트넘이 자랑하는 공격진 ‘D·E·S·K 라인’ 중 최고 점수를 줬다.
그러나 팀이 패하면서 손흥민의 고군분투도 빛이 바랬다. 그는 은메달을 목에 건 뒤 관중석으로 달려가 자신의 축구인생에서 평생 스승이기도 한 아버지 손웅정씨 등 가족들과 포옹했다.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에선 평소와 달리 국내 취재진 인터뷰를 사양한 채 그대로 구단 버스에 올랐다. 그 만큼 아쉬움이 컸다는 뜻이다. 방송사 인터뷰에서만 영어로 답변했는데 “지난 3주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졌지만 우리 팀이 자랑스럽다”며 “우리에게 운이 없었다. 우리가 좀 더 좋은 팀이었으나 그저 운이 없었다. 다시 도전하겠다”고 했다. 결승전 직후 전세기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간 손흥민은 휴식을 취한 뒤 4일 파울루 벤투 감독이 지휘하는 축구대표팀에 합류해 5일부터 A매치를 위한 본격 훈련에 돌입한다.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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