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윤소윤 인턴기자]"여기는 러시아가 아닌 평창입니다."


지난 201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평창 올림픽. 곽민정(25)은 벤쿠버 이후 8년 만에 올림픽 무대를 다시 밟았다. 선수가 아닌 해설위원으로서였다. 당시 만 24세, 피겨 해설 1년 차였던 병아리 해설가 곽민정은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당당히 또 덤덤하게 피겨 팬들을 위한 목소리를 냈다.


러시아 선수들이 너무나도 편파적인 기준으로 예술점수(PCS)를 올려 받는 상황 때문이었다. 자신도 선수였던 시절이 있었기에, 다른 선수들의 노력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던 그였다. 그렇게 평창에 울려퍼진 곽민정의 한 마디는 첫 올림픽 해설이 무색할 정도의 내공과 강단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안양 빙상장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곽민정. 작은 체구였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남달랐다. 녹음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에서는 1시간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재밌는 언변의 소유자기도 했다.


"말씀을 굉장히 잘하시네요"라는 칭찬에 "저 프로 방송인이잖아요(웃음)"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유망주였던 어린시절을 거쳐 역대 한국 여자피겨 사상 최연소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던 곽민정의 찬란했던 피겨 인생을 만나봤다.


◇ 적수가 없었다?…"NO, 나는 경쟁력 있던 선수"


9세 때 처음 피겨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그리 특별하지도, 남다르지도 않았다. "겨울방학 특강으로 배우던 중에 선생님께서 저를 따로 뽑아서 개인 레슨을 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스케이트를 신게 된 곽민정은 2005년 전국 체전 1위를 시작으로 국내 대회를 휩쓸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적수가 없었다"는 말에 곽민정은 "적수가 없다…하하 그랬나요?"라며 멋쩍어했다.


"제가 아홉살때 시작을 해서 4학년 때부터 전국 대회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적수가 없다기 보다는(웃음). 저도 어린 상태니까 제 실력을 모르고 시합 나가던 와중에 상위권을 하니까 경쟁력이 있구나 이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겸손했다. 그렇지만 성적은 그렇지 않았다. 2008년에는 주니어 그랑프리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며 당당히 국제무대 진출을 알렸다. 당시 그랑프리 3차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며 입지를 다져 나갔다.


"2007년부터 국가대표가 되면서 국제 시합이라는 걸 처음 나가봤어요. 그래서 몇 등 할지는 모르는 상태였고, 준비하는 대로 해서 나가자 했는데 메달이 나오니까. 이것도 '내가 경쟁력이 있구나! 못하진 않는구나!' 생각했죠(웃음)."


남다른 성적과 재능에 큰 목표가 생길 법도 했지만, 지금의 곽민정처럼 어린 시절의 곽민정도 털털했다. "'몇 등을 목표로 해야겠다' 라던가, '어떤 대회를 나가봐야겠다' 이런 건 전혀 없었어요. '우선 가서 몇 등이 찍히나 보고 생각해보자'였죠. 하하."


◇ 피겨 여제들, 밴쿠버를 수놓다


"연아 언니와 좋은 그림으로 잘 마무리 했던 것 같아요. 예쁘게."


2010년 곽민정은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태극 마크의 무게를 안고 올림픽에 나섰다. 긴장될 법도, 부담될 법도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밴쿠버 올림픽 출전 자체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올림픽 출전은)전혀 예상 못 했어요. 연아 언니를 제외하고 딱 한 명 출전하는 거였는데, 나이 제한이 있었고 저는 딱 시니어 컷에 있어서 경쟁 선수중에 제일 어렸거든요."


당시 곽민정은 아슬아슬하게 시니어 컷을 맞춰 올림픽 출전 나이 제한을 통과한 상태였다. 김연아가 후배들의 출전권 한 장을 따놓은 덕에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이 올림픽 티켓을 두고 선발 경쟁을 펼쳤다.


"경쟁자들이 다 언니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기대 안 하고 그냥 소치 올림픽을 목표로 했죠. 언니들도 전부 잘하고 계셨고, 저는 '잘해도 선발전 2-3등 하겠지' 생각했어요."


마음을 비웠기 때문일까. 한 장의 올림픽 티켓은 막내 곽민정에게 돌아갔다.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이었기에 그 기쁨이 배가 됐을 법도 했지만 16세 소녀에게는 그저 새로운 설렘일 뿐이었다. "'선발전이나 잘 하자' 이 마음이었는데 운이라는 게 참 중요하더라고요. 저는 선발전 때 금메달 찍혔을 때도 그냥 "와 대박! 엄마 1등! 나 1등!" 이러고 끝났어요(웃음). 올림픽 출전을 연관 지어서 생각도 못 했죠."


선발전이 끝나고 나서 인터뷰를 하는 도중 그는 자신이 김연아와 함께 올림픽 출전을 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나중에 인터뷰 하면서 기자 분이 '김연아 선수랑 올림픽 나가게 됐는데 어떠냐'는 질문을 하셔서 그때 알았어요. 입이 떡 벌어졌죠."


16세의 곽민정은 모든 부담감과 긴장감을 훈련으로 이겨냈다. "저는 그냥 국내 대회를 하더라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면 굉장히 떨리고, 아무리 큰 대회라도 준비가 잘 되면 안 떨려요. 올림픽 땐 정말 많이 운동했기 때문에 안 떨렸어요.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못할 정도로 열심히요. 그 정도로 준비하면 웬만하면 안 망해요. 하하."


당시 곽민정은 전성기의 김연아와 대부분의 시즌을 함께 했다.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를 위한 피겨 여왕의 조언은 어땠을까. "연아 언니요? 그때 언니 하기도 바빠서요 하하. 언니도 1등 해야 하는 사람이라 저까지 신경 못 썼죠 당연히!(웃음)." 얼음 여제들다운 쿨함이었다.


피겨여왕 김연아와의 각별했던 사이도 전했다. "요즘 후배들은 연아 언니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아예 세대가 달라서 대선배 같은 느낌일 거예요. 근데 저는 같이 운동을 한 세대여서 선배 보다는 가까운 언니였어요. 개인적으로도, 운동할 때도. 훈련에 대한 조언보다는 같이 으쌰으쌰 했어요. 언니도 힘들고 저도 힘드니까.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아 오늘 어떻게 버티냐' 이런 얘기 하고 하하. 같이 응원하고 그랬어요."


서로에겐 가깝고 편한 사이였으나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김연아에게로 쏟아졌기에, 함께 올림픽 무대에 서게 된 곽민정에겐 많은 생각이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연아 언니한테 주목이 쏠리는 건 너무 당연한 거였어요. 저는 100중에 100이 언니한테 가도 상관이 없었는데 100중에 10은 저한테 온 거기 때문에 그 정도도 감사했어요. 부담스러운 거 전혀 없었고요."


그런 국민들의 소중한 관심과 응원을 등에 업고 곽민정은 올림픽이라는 역사적인 무대에서 최종 13위라는 엄청난 성적을 냈다. 그에게 올림픽 13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만족! 완전 대만족이요(웃음). 제 첫 번째 목표는 올림픽 출전이었고 두 번째는 프리 출전이었는데 다 이뤘거든요. 그리고 사실 꼴등을 해도 상관없었어요. 그냥 열심히 해보자 했는데 쇼트에서 15등을 한 거예요. '아…또 뭔가 되는구나!' 했죠. 하하 '프리 컷인 24등이 목표였는데 15등을 했다니!' 하면서 프리 정말 맘 편하게 나갔어요."


올림픽 선발전부터 올림픽 무대까지 단 한 순간도 부담을 갖거나 긴장을 한 적이 없던 곽민정이다. 결국 최종 순위 13등이라는 괄목할 만한 기록을 안고 자신의 첫 올림픽 무대를 마쳤다. "'아 세상 다 가졌다' 했어요(웃음). 연아 언니는 목표했던 1등을 했고, 저는 24등이 목표였는데 13등을 했고. 좋은 그림으로 잘 마무리했던 것 같아요."


◇ 슬럼프를 이겨내고 '지도자'로 반등하다


모두가 곽민정의 승승장구를 예상했다. 올림픽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었기에,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였다. 그러나 올림픽 이후 곽민정은 슬럼프와 부상의 늪에 빠졌다. "많은 분들은 제가 밴쿠버 이후에 치고 올라 갈거라 생각하셨겠지만 사실 피겨 바닥을 아는 분들은 계속 올라가는 게 쉽지 않다는 거, 전성기가 긴 종목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전성기를 끌고 가는 게 쉽지 않았죠."


올림픽 이후 2011년까지 곽민정의 활약은 이어졌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며 전성기를 맞이하는듯 했으나 이후 급격하게 실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는 사실 2011-2012 두 세 시즌 잘 끌고 간 거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요. 저는 그거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일이 있는 거거든요. 하하. 소치 올림픽 출전 못 하고, 후배들한테 밀리고. 사실 밖에서 보면 '쟤 이제 못하나 봐'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자연스러운 코스고 은퇴였어요. 조금 더 잘했으면 좋았겠지만. 저도 당시엔 힘들었거든요. '이렇게 빨리 떨어지다니. 전성기가 너무 짧은데?' 하면서요 (웃음)."


은퇴 당시의 소감을 묻자 "저 은퇴식 안 했어요 아직 은퇴한 거 아니야!(웃음)"라며 자신의 2막 인생에 대해 입을 열었다. "2015년 유니버시아드 출전을 못 하게 되면서 은퇴를 마음먹었어요. 성적이 안 나오니까 그만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선수 타이틀이 아닌 내 상황이 용납이 안되는 거예요. 받아들이는데 되게 오래 걸렸어요."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달려온 피겨였기에, 그 어떤 순간보다도 내려놓기가 쉽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경기를, 국제무대에서의 경쟁을 견뎌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없이 작아졌다. "'뭘 해야 하나, 나는 아직 어린데 왜 은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거지?' 이런 생각 때문에 1년 반 정도는 멘탈이 나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그를 끌어내 준 것은 '지도자'라는 새로운 타이틀이었다. 2016년부터 최다빈(19·고려대)과 임은수(16·서현고)의 서브 코치로 활동하며 피겨인생의 새로운 장을 써내려갔다. "저랑 같이 탔던 선수들을 가르치게 됐어요. 되게 좋은 경험이었죠. 저한테는 엘리트 선수들을 바로 가르칠 기회가 주어진 거니까."


어린 나이부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국제무대를 경험한 그였기에 후배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아낌없이 줄 수 있었다. "제가 국제 시합을 많이 나가봤기 때문에 후배들을 국제 대회에 데리고 다니면서 해줄 수 있는 게 많았어요. 나이 차이도 크게 안 나서 애들이 언니처럼 편하게 대했고. 저는 거의 같이 놀거든요(웃음)."


◇ 눈물의 평창올림픽 "나는 주책바가지"


"후배들 얼굴을 보면 심정이 어떨지 이해가 가요. 제가 해봤으니까."


2017년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해설가 곽민정'의 새로운 인생도 펼쳐졌다. 방송인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그. 피겨를 시작하기 전에는 아나운서를 꿈꾸기도 했다고.


"아, 이게 자랑이 아닌데 자랑처럼 되네요." 쑥스러워하며 해설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전했다. "제가 어릴 때 인터뷰를 할 때도 잘 안 떨었어요. 카메라를 원래 안 무서워했고. 방송국에 계신 몇몇 분들이 알고 계셨는지 먼저 연락을 주셨죠."


떡잎부터 남달랐던 그였기에 새로운 기회도 주어졌다. 올림픽 중계를 위해 1년 전인 2017년 시즌부터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올림픽 중계를 하려면 그전부터 다져놔야 하잖아요. 중계를 망할 순 없으니까? (웃음). 저는 처음에 되게 망설였어요. 사실 엄마가 저 아나운서 시키고 싶어 하셨거든요. 근데 운동을 하면서 방송을 할 수 있는 게 해설이잖아요. '해야 돼, 말아야 돼' 하면서 얼떨결에 시작을 한 건데 하면서 제가 더 신난거죠. 하하."


첫 방송 당일, 긴장했을 법도 했으나 당시의 곽민정은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피디님들이 너무 편하게 잘 해주셨어요. '네 놀이터라고 생각해라'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진짜…그냥 놀았어요 (웃음). 어떻게 보면 코치를 하면서 해설을 한다는 게 스트레스일 수 있는데, 저한텐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생각해요."


그랬던 그도 자신이 아끼는 후배들의 올림픽 무대를 볼 때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2018년 2월, 곽민정은 KBS2의 해설 위원이자, 대한민국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들의 선배로 평창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제가 하는 것보다 후배들이 하는 걸 보는 게 더 떨리더라고요. 제가 못하는 건 저 혼자 감당하면 되는데, 저는 여기서 믿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애들 얼굴을 보는데 시작하기 전부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주책바가지처럼. 감정이 막 올라와서 말도 잘 안 나왔고요."


아이스쇼, 종합선수권, 아시안게임 등 다양한 무대에서 해설 마이크를 잡았던 그였으나 후배들의 올림픽 무대에서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실제로 차준환의 프리 무대가 끝난 뒤에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프리스케이팅 당시 차준환은 심한 독감을 앓고 있어 국내외 팬들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곽민정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준환이랑 친하다 보니까, 남들이 볼 수 없는 상태들도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걱정도 많이 했고, 잘 버틸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와중에 잘하니까 감정이 같이 올라왔어요. 다른 분들이 중계 하다가 눈물 흘리시는 거 보면 '왜 저럴까' 했는데 제가 그러고 있더라고요. 하하"


올림픽 당시 눈물을 흘리는 곽민정의 모습은 전국에 생중계 되며 큰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샷 들어온 거 알았으면 얼굴이라도 뒤로 뺐을 텐데 피디님들이 그걸 광고에 쓰시더라고요? (웃음)."


◇ 나에게 피겨는 전부…"모든 것을 다 해볼 것"


"목표는 커요. 뭘 잡아도 제 마음이니까, 달려가는 거죠."


곽민정이 해설 마이크를 잡았던 KBS2 중계는 올림픽 피겨 중계방송 시청률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간은 접하지 못했던 '사이다 해설'의 화려한 등장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제 방송이 호불호가 갈려요. 제가 직구를 많이 날리고 조용하지 않아요. 지를 땐 지르고."


실제로 평창올림픽 당시 편파 판정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그였다. "악플도 가끔 있었지만, 세고 이런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응원해 주시더라고요. 그게 컨셉트예요. 저는 항상 마지노선에서 놀아요. 그래서 피디님들이 불안하실 거예요(웃음)."


해설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그였다. 사회에서의 24~25세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큰 꿈을 꾸며 새로운 세상을 위해 나아가는 시기이지만, 어린 나이 때부터 피겨만을 위해 달려온 곽민정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또래들이 2막을 시작할 때 '은퇴'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어야 할 나이에 다 끝나서 허무했어요. 뭘 해야 할 지 모르고 방황도 했고요. 평생 목표를 향해 달리다가 그게 사라져버리니까 참 힘들더라고요."


그런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 역시 새로운 목표와 꿈이었다. "제가 올림픽을 선수로 나가고 해설로 가봤잖아요. 그래서 두 가지를 더 해보려고요. 하나는 선수를 데리고 올림픽을 나가는 것. 또 하나는 국제 심판으로 채점해 보는 게 목표예요."


선수로서의 타이틀은 내려놓았지만, 피겨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전보다 훨씬 커진 그였다. "이걸 이룬다면 피겨라는 종목에 제 타이틀이 다 다르고 올림픽을 계속 경험하는 거잖아요. 그 정도면 이뤘을 때 뿌듯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조금씩 준비하고 있어요(웃음)."


인터뷰 끝자락에는 최종 꿈을 전하며 후련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피겨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하고 싶어요. 코치, 해설, 안무가 뭐 전부요. 제가 작년 준환이 아이스쇼 때 군무 안무를 맡았어요. 하다 보면 점점 더 노하우가 생기겠죠? 제가 뭘 하든 피겨가 메인이 될 거니까, 그런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꿈은 항상 커요. 하하."


'키스 앤 크라이(Kiss and Cry)'. 아이스링크의 한 구역으로 피겨 스케이터가 공연하기 전과 후 대기하는 장소다. 마음을 졸이며 앉아있는 그곳에서 짧은 순간 동안 선수들은 기쁨에 웃고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빙판 위에서 아름다움을 수놓았던 그는 이제 링크장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꿈을 수놓게 됐다. 열여섯 막내 국가대표에서 이제는 후배들을 위한 든든한 조력자로, 믿음직스러운 버팀목으로 성장한 곽민정. 오롯이 그를 위해 준비된 '키스 앤 크라이'에서 기쁨의 웃음을 지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younwy@sportsseoul.com


사진 | 스포츠서울 DB, 곽민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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