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박준범기자]김승현(41)의 등장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빠른 스피드와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드리블과 패스는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는 화제가 됐고, 농구 팬들에게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그의 활약 속에, 직전 시즌 32연패를 했던 대구 동양 오리온스(現 고양오리온 오리온스)는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김승현 역시 신인상과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도 목에 걸며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널리 알렸다.


물론 부침도 있었다. 부상과 구단과의 갈등이 겹치며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기도 한 것. 하지만 그는 2년여의 공백을 깨고 복귀했고, 보란 듯이 여전한 감각을 선보이며 김승현이 죽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MBC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지도자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김승현을 만났다.


◇ 우승·신인상·MVP까지…"동료들 있었기에 내가 존재"


송도중-송도고 출신인 김승현은 지금은 고인이 된 전규삼 전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전 전 감독은 자유로운 농구를 추구했던 지도자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는 전 전 감독을 추억하며 "인성이 먼저 되어야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저 때는 원래 운동만 하고 수업을 받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7교시까지 수업을 다 듣고 훈련했다"고 전하면서 "농구적인 측면에서는 기본기를 강조하셨다. 그때는 지겨웠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기본기를 탄탄히 해놨던 게 도움이 많이 됐다는 걸 느꼈다"고 회상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김승현은 2001년 드래프트 1차 3라운드로 대구 동양에 입단하게 된다. 그럼에도 프로 무대 데뷔를 앞둔 김승현을 향한 부정적인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김승현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시선을 실력으로 깨트렸다. 그는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대학교 때도 우승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잘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면서 "김진 감독님이 저를 믿고 경기를 맡겼다. 특별하게 지시하고 그런 게 없었다. 감독님과 저 사이의 신뢰가 있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코트에서는 나이도, 신장도 중요치 않았다. 그는 데뷔 시즌에 전 경기 출장에 평균 12.2점, 평균 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야전사령관'으로서 팀을 진두지휘했다. 김승현은 "프로에 와서 김병철, 전희철, 박재일과 같은 선수들이 저를 믿고 스포트라이트를 저한테 넘겼다. 저랑 함께해준 형들과 외국인 선수에게 고맙다. 제가 있기에 그들이 존재한 게 아니라, 그들이 있기에 제가 존재했던 거다"라고 동료들에게 공을 돌렸다.


김승현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금메달을 따낸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이다. 당시 대표팀은 필리핀과의 준결승전에서 이상민의 극적인 3점 슛으로 결승에 올랐다. 그는 "결승전을 앞두고 선수들끼리 '할 만큼 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중국은 어차피 못 이기는 팀이었다. 그런데 경기 당일에 형들 눈빛이나 모습이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마음가짐이 보였다"고 설명했다.


김승현은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4쿼터 막판 투입돼 결정적인 가로채기와 어시스트를 해내며 승리에 일조했다. 그는 "투입될 때 느낌은 패전 처리였다"면서도 "그래도 시간이 있으니까 열심히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행히 중국에서 저를 몰랐던 거다. 처음 성인 국가대표 뽑힌 거였으니까 저에 대한 자료가 없었을 거다"라며 겸손함을 표했다.


◇부상→구단과 갈등→복귀 후 은퇴…"지금도 자신 있다"


팀의 우승, 신인왕과 MVP 그리고 금메달까지. 너무나 탄탄대로를 달렸던 걸까. 그의 농구 인생에도 굴곡은 존재했다. 부상에 이른 구단과의 갈등이 그를 덮쳤다. 그는 "자유계약 선수가 됐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롭지 못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5년 동안 열심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지난 일이지만, 그때 다른 팀으로 옮겼다면 아직도 농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는 "2년 동안 구단과의 소송에서 1심, 2심 모두 이겼다. 구단은 제가 농구를 못하게 임의탈퇴 처리를 했다. '돈을 받고 농구선수를 안 할 거냐', 아니면 '돈을 포기하고 농구를 할 것이냐'는 기로에 섰다. 주변에서 '농구를 다시 하는 게 맞다'고 조언했고, 돈 대신 가고 싶은 팀에 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팀을 옮기게 됐다"고 담담히 전했다.


그렇게 김승현은 우여곡절 끝에 삼성 유니폼을 입고 다시 코트를 밟는다. 그는 "(복귀 후) 첫 경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몸이 완벽하게 만들어지지 않아서 버벅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왼손은 죽지 않았구나'라는 걸 느꼈다. 사실 지금도 자신 있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그의 말대로 예전의 기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의 패싱력은 살아있었다. 그러나 삼성과의 재계약에 실패하고 2015년 은퇴를 선언한다. "이상민 감독이 부임하고, 저보고 1년 더 하자고 했는데 구단에서 계약을 거부했다. 이상민 감독은 지금도 농담 삼아 다시 복귀하라고 한다. 은퇴를 빨리 해서 안타까운 건 있지만, 당시엔 팀을 옮겨 다니면서 농구를 하고 싶지 않아서 과감하게 은퇴를 하게 됐다"고 당시를 곱씹었다.


◇영글어 가는 지도자의 꿈 "저만의 스타일 팀 만들고파"


은퇴 후 김승현은 SKY 스포츠를 거쳐 지금은 MBC 스포츠 해설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아는 것만 보고 이야기했다. 최근에 제 말주변이 늘었다는 걸 느꼈다. 편하게 수다 떠는 것처럼 해설을 하는 것 같다. 계속하다 보니 말이 느는 것 같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해설위원을 하면서 농구 지도자의 꿈도 꾸고 있다. 그는 "농구를 보는 시야나 눈은 더 좋아지고 있다"면서 "저만의 농구 스타일이 있지 않나.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그대로 입힐 거다. 평균 100점대 득점이 나올 정도의 공격력을 선보일 예정이다. 감독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엄청나게 재밌는 농구를 할 수 있을 자신감이 있다"고 강조했다.


◇ "한국에서 가장 독창적으로 농구했다는 자부심"


그는 자신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들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김승현은 운동도 열심히 안 하고 놀러만 다닌다'고 한다. 저는 이해할 수 없다. 할 때는 진짜 열심히 하고, 쉴 때는 누구보다 잘 쉬었던 것"이라고 토로했다.


인터뷰 말미, 대화 주제는 KBL이 지난 2017년 출범 20주년을 맞아 선정한 12인의 레전드 명단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김승현은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에 대해 "저는 누가 인정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농구를 했던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플레이를 했다. 색깔만큼은 아주 확실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라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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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스포츠서울 DB, 박준범기자 beom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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