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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올림픽 레거시(legacy)는 단순히 상징적 유형물에 국한된 건 아니다. 올림픽 정신을 고양하고 올림픽의 땀과 눈물 그리고 스토리를 떠올리게 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들이 올림픽 레거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가장 돋보이는 레거시 중 하나로 컬링의 저변확대를 꼽고 싶다. 스포츠의 균형잡힌 발전은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 중인 한국 체육에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안방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에서 구색 맞추기용으로 치부됐던 컬링이 이제 한국 동계 스포츠의 당당한 종목으로 자리잡고 있어 가슴 뿌듯하다. 특히 인구 28만명의 중소도시인 춘천(시장 이재수)에 불고 있는 컬링 바람은 예사롭지 않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컬링의 매력을 맘껏 뽐낸 경북체육회로부터 여자 대표팀 바통을 넘겨받은 춘천시청의 최근 활약상은 눈부시다.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선수권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그해 9월 2018~2019시즌 월드컵 2차대회(미국 오하마) 은메달을 따냈고 지난 3일 막을 내린 월드컵 3차대회(스웨덴 옌셰핑)에선 금메달을 거머쥐며 신바람을 냈다. 구색 맞추기에 급급했던 비인기 동계종목이 이처럼 짧은 시간에 월드클래스급으로 성장한 건 평창동계올림픽을 빼놓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자국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컬링이 지닌 묘미에 흠뻑 빠진 국민들의 사랑과 관심이 선수들과 지도자들에게 동기부여로 고스란히 전해진 결과일 게다.

춘천은 ‘호반의 도시’답게 한국 동계 스포츠의 메카로 불렸다. 겨울이면 공지천 특설링크에서 내로라하는 전국 빙상대회가 열리곤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실내링크 활성화에 따른 스포츠 지형의 변화로 동계 스포츠의 메카였던 춘천의 상징성은 시들어갔다. 빛 바랜 앨범을 뒤적이게 하는 ‘동계 스포츠 메카’ 춘천의 아련한 추억이 컬링으로 완연히 되살아난 느낌이다. 사실 춘천의 컬링 역사는 꽤 오래됐다. 지금부터 약 20년 전인 2000년, 지금은 고인이 되신 강원대 유근직 교수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시민들에게 보급한 게 그 효시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인기 동계스포츠로 자리를 잡은 컬링이 춘천에서 활짝 꽃을 피우고 있는 건 걸코 우연이 아니다. 우선은 동계 스포츠의 오랜 역사성 덕분이다. 지역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동계 스포츠에 대한 친화력은 컬링 바람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이 됐다. 인구 28만명의 중소도시에서 지역 공동체의 의식을 결집하고 동원하는 데는 스포츠 콘텐츠가 제격이다.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시스템에 있다. 단일지역에서 선수 수급이 가능한 수직계열화의 시스템이 춘천 컬링이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이다. 현재 춘천은 남녀 초등학교(신남초)~남녀 중학교(소양중, 남춘천여중)~남자 고등학교(춘천기계공고)~남녀 실업팀(강원도청, 춘천시청) 등 모두 6개 팀이 있다. 유일하게 이가 빠진 여자 고등학교 팀 창단작업도 최근 마무리됐다. 이른 시일 내에 강원체고에 여자팀이 창단하면 춘천은 명실상부한 컬링의 메카로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게 될 전망이다.

지방 중소도시에 적합한 스포츠가 뿌리를 내리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스포츠의 다양성이 필요한 지금의 상황에서 스포츠를 통한 시민공동체의 구현은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한국 스포츠의 지형에도 모범적인 사례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춘천에 불고 있는 컬링 바람을 얘기할 때 걱정거리도 없지 않다. 컬링이라는 종목이 실내경기장이 필요한 특수공간의 스포츠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래저래 고민이 크다. 선수수급에서 수직계열화를 이룬 시스템을 갖췄지만 인프라가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향후 과제다. 현재 춘천은 컬링장이 없어 6개 팀들이 의정부와 강릉을 오가며 훈련하고 있는 신세다. 그렇다고 해서 춘천에 컬링장을 덜컥 짓자고 주장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60~100억원 가량이 소요되는 경기장 비용을 고려하면 진지한 고민과 다양한 접근을 통해 지역 공동체의 목소리가 반영된 합리적 결정이 필요할 듯 싶다.

실내경기장이 없어 큰 고민이겠지만 춘천에 부는 컬링의 새 바람은 신선하고 의미가 깊다. 지역공동체 전체가 공감하는 비인기 종목의 육성과 발전은 평창동계올림픽이 남긴 가장 값진 레거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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