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의 천재가 신세계를 연다. 0.9%의 비범한 사람이 통찰력을 가지고 그 길을 쫓아간다. 나머지 99%는 평범한 우리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W’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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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키스트 아워 분장팀. 오른쪽에서부터 다이아나 최, 츠지 카즈히로, 팀원들.

[스포츠서울 배우근 기자] 지난 3월 미국 LA의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분장상에 영화 ‘다키스트 아워’가 호명됐다. 대표 수상자인 메이크업 디자이너 츠지 카즈히로가 나란히 앉아 있던 붉은 드레스의 한 여성과 포옹한 뒤 무대로 향했다.

화면에 잡힌 그녀는 게리 올드만이 분한 윈스턴 처칠의 특수가발을 만들어낸 다이아나 최(47).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그 분야의 메인스트림이 된 인물이다.

최근 20년 가까이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유명작 대부분은 다이아나 최의 손을 거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짐 캐리 주연의 ‘그린치’와 에디 머피 주연의 ‘너티 프로페서’가 시작이었다. 실력을 인정받자 여러 제작사의 러브콜이 쏟아졌고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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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X 메이크업 아티스트이며 위그메이커인 다이아나 최의 작업 모습.

그녀의 홈페이지(www.dianays.com)에 접속해 필모그래피를 확인하니 ‘맨 인 블랙’, ‘혹성탈출’, ‘헬보이’, ‘언더월드’, ‘엑스맨’, ‘아이언맨’, ‘배트맨’, ‘슈퍼맨’, ‘트와일라잇’, ‘어벤저스’ 시리즈 등 끝이 없다.

가장 마지막에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키스트 아워’와 각축전을 펼친 ‘셰이프 오브 워터’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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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에 참여한 다이아나 최와 메이크업팀. 오른쪽 두번째는 윤종빈 감독.

세어보다 지쳐, 얼마나 많은 작품에 참여했는지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해보니, 그녀는 “TV시리즈까지 더하면 약 130편 정도 된다”고 했다. 최근엔 강동원 주연의 한국영화 ‘인랑’과 남북문제를 다룬 ‘공작’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다이아나 최는 특수분장으로 시작해 지금은 위그메이커(특수가발제작)로 활동범위를 넓힌 상태다. 할리우드에서 위그메이커 전문가로 인정받는 이는 열명 남짓. 그 중에서 다이아나 최는 ‘최정상급 헤어 스페셜리스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컴퓨터그래픽(CG)이 발전하며 특수분장의 입지가 전성기에 비해 줄었지만 ‘헤어’와 같이 섬세한 작업은 그 중요성이 여전하다. 그래서 그녀의 스케줄은 늘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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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다이아나 최는 한국의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의 멤버가 됐다.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일하게 되었을까. 인문학과 특수분장이 연결되지 않는다.

할리우드는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치열한 전쟁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곳. 그곳에서 동양 여성의 핸디캡을 극복하며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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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나 최와 그녀의 스승이자 헐리우드 특수분장의 전설인 릭 베이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왔으니 다 자라서 온거죠. 영어도 자신 없고. 그래서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잡지를 보다 우연히 메이크업스쿨 광고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원래 관심 분야였거든요. 그리고 메이크업스쿨을 졸업하자마자 릭 베이커의 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됐어요.”“아주 운이 좋았어요. 릭 베이커는 할리우드 특수분장의 1인자거든요. 그의 스튜디오에는 20년 넘게 노력해서 들어온 사람이 있을 정도예요. 그만큼 특수분장 분야에서는 릭 베이커의 스튜디오에 들어가는것 자체가 목표인 사람도 많아요.

다이아나 최는 특수분장의 길에 들어선 것에 대해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자신만의 특별함이 분명 있었을 터. 무엇이 그녀의 특별함일까.

“첫 작업이 ‘그린치’였는데, 6개월간 그린치에 나오는 캐릭터의 귀 5000개를 전부 만들었어요. 그렇게 밤낮없이 일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특수헤어 부문 책임자인 실비아 나바가 내가 작업하는 걸 보더니 ‘헤어를 배워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업무를 마치고 저녁에는 실비아로부터 헤어를 배웠어요. 막상 해보니 특수분장보다 헤어 스페셜리스트가 더 적성에 맞다는걸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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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분장과 헤어는 전문성이 다른 분야다. 다이아나 최는 특수분장으로 시작해 헤어를 겸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확장했다. 일반적으로 할리우드의 위그메이커는 사람의 헤어를 담당한다. 그러나 다이아나 최는 동물 뿐 아니라 킹콩, 몬스터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는 헤어 스페셜리스트의 길을 열었다.

그런 노력과 함께 그녀의 멘토이자 스승인 릭 베이커와 실비아가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릭 베이커는 7차례 아카데미 수상에 빛나는 할리우드 특수분장의 대가다. 실비아는 할리우드 특수가발의 선구자인 조세핀 터너의 후계자다. 즉 다이아나 최는 릭 베이커와 실비아의 후계자로 그 계보를 이어나갔다.

덕분에 처음부터 최고 레벨에서 메인 배우만 상대했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이유다. 할리우드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는 천 명이 훌쩍 넘는 제작 참여자의 명단이 나온다. 그들 중에 백그라운드 작업자는 평생 메인 캐릭터와 일하지 못하는 게 할리우드의 냉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운은 그냥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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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헬 보이’에 참여한 다이아나 최.

“사람들에게 몰매 맞을지도 모르겠지만(웃음), 나는 이 일을 하며 단 한번도 하기 싫은 적이 없었어요. 힘든 적도 없었죠. 내겐 이 일이 너무 쉽기 때문에 다른 일을 못합니다. 10시간이고 12시간이고 계속 일할 수 있어요.”“평상시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고 시간 낭비하는 걸 싫어해요. 낮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조차도 몇 년에 한 번 정도 할까요? 사실은 시간이 아까워서 그렇지만요. 아무튼 아무것도 안하는 걸 싫어합니다. 집이고 사무실이고 밥 먹고 잠자는 거 말고는 일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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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키스타 아워’에서 처칠로 분한 게리 올드만.

다이아나 최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다키스트 아워’에서 게리 올드만은 윈스턴 처칠을 완벽하게 구현하는데, 그녀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있다. 가발이 어려운 건 가발 같아 보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

다이아니 최는 다른 사람이 엄두내지 못하는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 머리숱이 없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처칠의 헤어를 만들어냈다. 섬세하고 힘든 작업. 그러나 그녀는 전혀 힘들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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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올드만과 함께.

“살면서 추구하는 건 ‘행복’입니다. 행복의 조건요? 나는 별로 복잡하지 않아요. 단순합니다. 건강하게 일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죠. 부자가 아닌 이상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이아나 최의 좌우명은 ‘멋지게 살자’다. 멋진 삶의 기반은 일이다. 그곳에서 행복을 찾기에 그렇다. 다이아나 최는 특수분장을 배우고 나서 의상 디자인도 배웠다. 그 과정 역시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특수분장 쪽으로 너무 많이 와버려 의상디자인은 결국 포기했는데, 그때 알았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전혀 힘들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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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쥬라기 공원’ 작업을 하며 주연 배우 크리스 패럿과 함께.

“성공이요? 돈 많이 벌고 명성을 떨치는 것보다 지금 나의 생활에 만족합니다.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고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나는 성공한 거 같아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의 일을 할 겁니다. 그게 성공이고 행복이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고요? 그냥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나를 기억하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뭐 중요한가요. 나를 알아주는 거 필요없어요. 내가 행복하고 내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죠.”

다이아나 최는 특수분장과 전혀 상관없는 청춘을 보냈다. 미국으로 건너간 다음에 메이크업을 공부했고 이어 특수분장이라는 분야로 진입했다. 그녀는 인생항로의 큰 변화속에서 성공한 비결로 ‘운’과 함께 ‘인성’을 강조했다.

“일도 중요하지만 사람 관계가 더 중요한 거 같아요. 그건 아마 어디든 마찬가지겠죠. 할리우드에 보면 천재적인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성격이 나빠도 기용해요. 그러나 천재적이지 않다면 인성이 좋아야해요. 물론 실력은 가장 기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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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퍼 서덜랜드와 함께.

다이아나 최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운을 불러온 세심한 끈기일까. 아니면 겸손해서 밝히지 않은 천재성이 있는 것일까.

“저요? 천재성 없어요(웃음). 천재는 티가 나요. 이번 아카데미에서 수상자로 무대에 오른 카즈히로와 같은 사람이 천재죠. 그들은 그냥 타고 나요. 본인 스스로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고 어릴 때부터 그걸 하면서 성장해요. 그런데 ‘다키스트 아워’의 프로듀서가 내게 ‘너는 장인이다’라고 말해준 적이 있어요. ‘천재의 마음을 읽어 표현하는 장인. 그들이 상상하는 걸 너는 손으로 만들어낸다. 그게 바로 너’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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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기와 인내, 그리고 세심함은 천재의 창조성과 다르다. 그러나 다이아나 최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입지를 굳혔다. 이제는 자신의 분야에서 ‘장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과 같은 길을 걷고 싶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뭐든지 좋아하는 걸 시도해 보세요. 그런데 너무 하고 싶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단 잘 할 수 있는 걸 선택하는게 좋다고 봐요.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분들은 평생 배우자를 고르는 것처럼, 일도 연애하듯 찾아보세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나와 잘 맞는 일을 찾는 것도 현명한 방법인거 같아요. 두려움은 버리세요.”

kenny@sportsseoul.com.

사진 | 다이아나 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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