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이게은기자] 짧은 머리, 바지를 고수하는 보이시한 스타일과 폭발적인 성량을 가진 가수 이선희(54)는 걸크러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걸크러시는 여성이 다른 여성을 동경하는 것을 뜻하거나 당당한 여성을 지칭하기도 하니 무대를 주름잡는 당찬 힘을 지닌 이선희를 표현하는데 제격이다.


데뷔 34년 차에 접어든 이선희는 그 어떤 가수보다 디스코그래피가 화려하다. 히트곡만 해도 셀 수 없다. 그는 1984년에 열린 제5회 강변가요제에 '4막 5장'이라는 혼성 듀엣을 결성해 참가했다. 큼지막한 안경에 다소 촌스러운 파마머리로 등장한 21세 여대생 이선희는 'J에게'를 불러 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아버지는 딸이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이를 무릅쓰고 출전한 가요제에서 화려한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이선희는 'J에게'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KBS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해 골든컵을 수상한데 이어 그해 열린 KBS '가요대상'에서는 신인상을 받았다. 또한 MBC '10대 가수 가요제' 서 최고 인기 가요상, 신인상, 10대 가수상을 품에 안으며 3관왕에 등극했다. 이선희는 이른 바 '언니 부대'도 이끌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듬해 발표한 1집 타이틀곡 '아 옛날이여'를 비롯해 '소녀의 기도', '갈등'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J에게'로 얻은 인기가 일회성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어 발표한 2집 수록곡 '가난한 연인을 위하여', '그래요, 잘못은 내게 있어요', '연인의 눈물' 등으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선희는 KBS '가요대상'에서 올해의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 2년 만에 이룬 눈부신 성과를 이뤘다.


1986년 발표한 3집 '알고 싶어요', '잃어버린 약속', '영'도 줄줄이 히트시키며 KBS '가요대상'에서 올해의 가수상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10대 가수상을 손에 쥐었다. 발표하는 곡마다 사랑받았고 연말 시상식에서 굵직한 상은 이선희 몫으로 돌아갔다.


1988년 발표한 4집에서도 이선희의 명곡이 여럿 탄생했다. '나 항상 그대를'로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1972년 신중현과 더맨이 발표한 '아름다운 강산'을 리메이크해 폭발적인 가창력을 다시금 인정받았다. '사랑이 지는 이 자리', '안녕'과 더불어 만화 '달려라 하니' 주제곡을 불러 히트시켰다.


1989년 5집을 통해서는 '겨울 애상', '한바탕 웃음으로'로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특히 '나의 거리'로 또다시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골든컵을 수상했다. 1980년대 후반 가요계 판도 주도자는 이선희였다.


1990년대 초반 한때 정치인의 삶에 발을 들이기도 했지만 음악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1991년 7집 '그대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8집 '조각배', 9집 '한 송이 국화', 10집 '퍼스트 러브(FIRST LOVE)'를 발표하며 열일 행보를 보였다. 특히 10집 앨범은 이선희가 전곡을 작사, 작곡해 싱어송라이터로서 존재감을 높였다.


아이돌 그룹이 가요계에 강세를 보이기 시작한 2000년대에도 이선희는 늘 그래왔듯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2001년 '마이 라이프+베스트(My Life + Best)'를 발표해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또 다시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이선희는 제작자로 변신했다. 고등학생이던 이승기를 직접 캐스팅해 가수로 탄생시킨 것. 자신의 집에서 합숙시키며 보컬 레슨을 책임졌고 인성 교육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선희의 트레이닝을 거쳐 2004년 데뷔한 이승기는 현재까지도 가수, 예능, 연기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선희는 2005년 발표한 13집 '사춘기'의 타이틀곡 '인연'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인연'은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의 남자' OST로 삽입됐는데 흥행에 힘입어 '인연'도 큰 사랑을 받게 된 것. 시기상 '인연'은 발매된 지 1년이 넘은 때였지만 온라인 차트 점령은 물론 앨범 주문량도 폭주했다. 가요계에서 이선희라는 세 글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2011년에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아이작스턴 오디토리움에서 단독 공연을 했다. 한국 가수로는 조용필, 패티김, 인순이에 이어 네 번째였다. 카네기홀 공연은 세계적인 가수들만 설 수 있다는 꿈의 무대로, 웬만해선 홀을 빌려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렇게 이선희는 한국 가수의 역량을 국제적으로 드높였다.


또한 같은 해 MBC 오디션프로그램 '위대한 탄생' 시즌2에서 멘토로 활약했다. 이선희는 참가자들에게 진심을 담은 따뜻한 조언을 건네 희망 멘토로 꼽히기도 했다.


데뷔 30주년을 맞던 2014년 15집 '세렌디피티(SERENDIPITY)'로 컴백했다. 2009년 발표한 14집 정규 앨범 '사랑아'를 이후 5년 만이었지만 여전한 저력을 과시했다. 타이틀곡 '그중에 그대를 만나'는 주요 음원 차트를 휩쓸며 전 세대에게 사랑받았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감성적인 멜로디가 대중의 취향을 저격했다. 13개 도시에서 열린 30주년 기념 콘서트는 27회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지난 3월에는 평양 공연을 다녀오면서 가수 인생에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조용필, 그룹 레드벨벳, 소녀시대 출신 서현, 백지영 등과 남측 예술단의 일원이 돼 방북했다. 이선희의 북한 공연은 2003년 평양에서 진행된 SBS '통일 음악회' 이후 두 번째였다.


'봄이 온다', '우리는 하나' 공연에서 이선희는 '아름다운 강산', '알고 싶어요', 'J에게' 등을 열창해 평양 시민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선보여 평양에서도 작은 체구로 뜨거운 존재감을 남겼다.


데뷔 후 흔한 논란 없이 묵묵히 가수의 길을 걸어온 이선희의 행보는 절제된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달 27일과 3일 방송된 SBS 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10번째 사부로 출격해 가수 활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전했다. '국민 가수'라는 왕관을 지탱하고자 쏟는 노력은 일상 생활에도 스며있었다.


이선희는 평소에도 목을 아끼기 위해 스카프를 매고, 의식적으로 작은 목소리로 대화한다고 밝혔다. "음악과 연관되면 다 좋고 재밌다고 느끼냐"는 양세형의 질문에는 "나도 '오늘 하루쯤은 쉬고 놀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적 갈등이 심하다"고 답했다.


또 "하나의 일을 오래 한다는 건 절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며 "절제를 통해 무대에서 더욱 쏟아낼 수 있다면, 가수로서 할 수 있는 건 그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깊은 울림을 전했다.


이선희는 데뷔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이에 휘둘리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왔다. 한결같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노력을 요하는 과정인데 그는 이를 절제로 유지했다.


엄격한 자기관리는 이선희가 34년 동안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여전한 티켓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저력이었다. 이미 전설이 된 '국민 디바' 이선희. 향후 행보도 황금빛이길 많은 이들은 기대하고 또 바라고 있다.


eun5468@sportsseoul.com


사진ㅣ스포츠서울 DB, SBS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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