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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역사는 집요하다. 세월을 관통하는 민족적 에토스(ethos)의 형성은 역사가 개인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게 바로 역사가 지닌 집요하고도 무서운 힘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H.카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설파한 것도 시간을 뛰어넘는 역사의 영향력에 주목한 때문이다.

지난 6일 세계를 들끓게 한 복싱 미들급 최강자 게나디 골로프킨(36·카자흐스탄)의 타이틀 방어전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두 가지를 가슴으로 느꼈다. 첫째는 골로프킨이 보여준 복싱의 탁월함에 대한 감동이다. 스포츠가 기예(技藝)의 과학이라는 사실을 군더더기없는 그의 복싱에서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 두번째는 바로 삶과 유리될 수 없는 역사의 규정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골로프킨의 복싱을 통해 잊혀져 가고 있는 우리 겨레의 슬픈 근대사 한 페이지를 읽을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이날 도전자 바네스 마티로시안(32·미국)을 2라운드에서 TKO로 눕힌 골로프킨은 러시아에서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고려인, 바로 우리 동포다.

고려인들은 1937년,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했다. 소련은 당시 연해주의 한국인을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 이는 제국주의 일본의 극동지역 팽창전략과 맞닿아 있다. 의심이 많았던 스탈린은 영민한 한국인이 일본의 첩자로 활동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이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20만명에 가까운 고려인의 슬픈 역사가 상식을 벗어난 한 독재자의 판단에 의해 잉태된 건 부조리한 세상의 전형이다.

마티로시안을 캔버스에 뉘며 버나드 홉킨스의 미들급 챔피언 역대 최다방어기록(20회)과 어깨를 나란히 한 골로프킨의 복싱에는 고려인의 슬픈 역사와 숨결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자신의 특이한 외모와 독톡한 민족적 에토스는 골로프킨을 주변인과 경계인으로 내몰았을 게 틀림없다. 주변인이 중심부의 사람들을 제치고 살아남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더욱 땀흘리고 목표 달성을 위해 우직하게 칼을 갈았을 것이다. 골로프킨의 복싱에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느 각도에서나 자유자재로 뿜어져 나오는 결정타인 라이트 훅과 라이트 어퍼컷은 주변인이 중심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련한 필살기였을지도 모른다.

강력한 펀치력을 지녔지만 그의 복싱이 화려하지 않는 것도 그의 삶과 맞닿아있다. 화려함은 곧 상대의 타킷이 될 수 있다는 경험에서 터득한 진리는 주변인의 자기 보호본능에 다름 아니다. 동급 최강의 골로프킨의 펀치력은 이제 노출된 그의 무기지만 실상 숨어 있는 최대의 강점은 디펜스 능력이다. 상대의 펀치를 상체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흘려 버리는 스웨잉(swaying) 기술은 승률 높은 골로프킨 복싱의 밑바탕이다. 전진 스텝으로 상대를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압박능력 또한 눈여겨볼 대목이다. 상대를 근접거리에 가둬놓은 뒤 쉬지 않고 퍼부어대는 속사포 펀치는 척박한 토양에서 백절불굴의 자세로 살아남은 한인 이주민의 초기 생존본능의 흔적일 수 있다.

골로프킨의 복싱은 단단한 바위를 연상시킨다. 화려함보다는 탄탄한 기본기가 바탕이 된 우직함이 그의 복싱 색깔이다. 그의 복싱에는 나라 잃은 민족에 또 한번의 비극을 안긴 고려인의 슬픈 역사가 숨쉬고 있다. 또 그 속에는 슬픈 역사를 극복한 강인한 정신이 꿈틀대고 있다. 민족적 정서인 한(恨)이 담긴 그의 복싱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아쉬움도 있다. 골로프킨은 누가 뭐래도 세계 최강의 복서지만 아직도 그의 파이트머니는 실력에 걸맞지 않게 저평가돼 있기 때문이다. 골로프킨의 지갑에 담긴 얇은 파이트머니는 부조리한 역사가 만들어낸 또 다른 산물인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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