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여자 컬링국가대표팀 주장 김은정이 지난 2일 경북 경산에 있는 경북체육회 사옥 앞 한 카페에서 스포츠서울과 만나 본지 1만호 기념 케이크 앞에서 손하트 포즈를 하고 있다.경산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경산 = 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여자 컬링 국가대표팀 주장(스킵) 김은정(28)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빛낸 최고 스타 중 한 명이다. 지난 달 25일 대회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지 보름 여가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는 경기 때 동그란 검은테 안경을 쓰고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섬세한 투구와 무서운 집중력, 팀을 한 몸 처럼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해 ‘안경 선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경기장 밖에서는 ‘천상여자’로 변신해 대중의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국민적인 인기를 실감케 하듯 각종 TV 프로그램과 광고, 행사 섭외가 끊이지 않는다. 그의 가치는 지난 9일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평창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 개회식에서도 빛났다. 휠체어컬링 대표팀 스킵 서순석과 함께 최종 성화 점화자로 나섰다. 최고 스포츠 스타들의 것으로만 알았던 성화대 앞에 자신이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포츠서울이 창간 1만호를 앞두고 김은정을 만난 건 패럴림픽 개회식을 일주일 앞둔 지난 2일이었다. 이날 경북체고에서 미디어데이와 지역 단체 미팅으로 바쁜 하루를 보낸 김은정은 오후 6시가 넘어서야 경북체육회 인근 한 카페에서 스포츠서울 1만호 인터뷰에 응했다. 안경을 벗고 지령 1만호 기념 케이크 앞에서 환하게 웃은 그와 올림픽 뒷얘기를 비롯해 스킵의 삶, 제2의 인생 등을 주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포토]신중하게 스톤 놓는 \'안경 선배\' 김은정
김은정이 지난달 23일 강릉 컬링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준결승전 한일전에서 스톤을 투구하고 있다. 강릉 |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포토]\'안경 선배\' 김은정, \'마늘 소녀들 결승 진출했어요!\'
자신의 샷으로 일본을 연장 승부 끝에 꺾고 결승 진출을 확정한 뒤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는 김은정.

◇ 아파트가 들썩였다고…“2002년 때 내가 본 그 감동이겠죠?”

알려진 대로 김은정을 비롯한 컬링 대표팀 ‘팀 킴’ 구성원들은 올림픽 기간 자진해서 휴대폰을 반납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오로지 스톤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안경 선배’, ‘영미야~’ 등 ‘팀킴’이 일으킨 컬링 신드롬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강릉컬링센터에 관중이 들어차고 자신들을 향한 응원 문구가 적힌 피켓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대회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다는 느낌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나중에 우리 경기 때 국민들의 성원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일부 아파트에서는 동 전체가 들썩였다는 얘기도 들었다”며 활짝 웃었다. 그러면서 “문득 어렸을 때 본 2002 한·일 월드컵이 생각나더라. 당시 골 하나하나에 모든 사람이 하나가 돼 기뻐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우리의 샷 하나하나가 그런 느낌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하늘에서 주신 선물 같았다”고 말했다. 또 일본과 준결승전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드로우 샷을 해낸 뒤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을 떠올리더니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우셨다고 들었는데 모든 이의 염원이 녹아든 샷으로 기억될 것 같다”고 돌이켰다.

◇ “스킵의 삶, 외롭지만…내가 완벽하면 팀도 완벽할 수 있죠.”

여자 컬링 신드롬은 사회적 현상으로도 풀어볼 수 있다. 갈수록 국론분열과 이념적 반목이 극대화하는 요즘이다. 올림픽 일부 종목에서 ‘왕따 논란’ 등 팀워크를 둘러싼 잡음이 나오면서 대중의 피로감은 극심해졌다. 어릴 때부터 한솥밥을 먹으며 남다른 ‘팀 정신’을 발휘해 은빛 신화를 일궈낸 여자 컬링에 손뼉을 치는 또 다른 이유다.

그러나 ‘팀’의 중심이 돼야하는 스킵의 삶은 참으로 고독하다. 주장으로 팀을 이끌고 결속하는 중심 구실을 하는 건 기본 업무다. 경기 중 여러 작전에 대해 최종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승부를 결정짓는 샷은 모두 스킵의 몫이다. 선수 시절 스킵을 경험한 김민정 여자 대표팀 감독은 “앞의 실수는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스킵의 샷은 승패와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스킵에게 모든 게 달렸다. 또 감독이 경기 때는 밖에 있기 때문에 스킵이 경기진행이나 아이스, 전술 등을 모두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은정은 “일본전도 초반에 잘하다가 마지막 샷이 흔들려서 연장까지 갔다. 다행히 연장 마지막 샷이 들어갔지만…”이라고 멋쩍게 웃으며 “압박감이 심한 건 맞다. ‘똑같은 드로우 샷인데 다른 친구들은 쉽게 버튼에 넣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하지?’라며 괴로워한 적이 많다”고 털어놨다.

스스로 올림픽 기간 A4용지에 ‘내가 완벽한 샷을 하면 완벽한 경기를 이끈다’는 문구를 적어 숙소 방문 등에 붙였다. 그는 “어떻게 보면 내가 다 한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나를 제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상황이든 길이 없진 않다. 좋은 상황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무조건 해결하자고 다짐했는데 실전에서 플랜B를 바로바로 떠올리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포토]\'안경 선배\' 김은정의 안경 속엔 오로지 컬링 뿐!

[포토]\'안경 선배\' 김은정, \'아... 이게 아닌데...\'

◇ 안경의 비밀? “경기 중 또 다른 나 찾기…실제 여자여자해요.”

“사실 성격 자체가 ‘여자여자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한다. 다만 운동할 땐 내 역할 자체가 책임감을 보여야 해서….” 4년 전 소치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뒤 김은정은 매우 괴로웠다. 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냉철하고 묵직한 기운을 품어야 하는 스킵 포지션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심리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답을 찾았다. 그는 “마음이 여러서 컬링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샷 실수도 그래서 나온다고 여겼다. 내 성향을 강하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구대 김성범 교수로부터) ‘은정 씨는 정말 여성스러운 것을 좋아한다. 그것을 배제하고 무시할수록 오히려 역량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쉴 땐 예쁘게 가꾸고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뒤로 나답게 취미 생활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익혔다. 자존감이 올라가면서 컬링 역시 슬럼프에서 벗어나더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과거 한 대회에서 상대 선수가 처음 본 은정이에게 경기 중 반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은정이는 가만히 있더라. 그 정도로 여리고 소극적이어서 팀을 잘 끌고 갈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나중에는 자기 스타일대로 이끌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기장 밖에서는 한없이 언니, 동생으로 팀원을 대하지만 경기 중엔 무서울 정도로 냉철해졌다. 그 원동력 중 하나가 안경을 쓴 채 표정 변화 없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경 선배’ 이미지는 어쩌다가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김은정

◇ “잘 생긴 아이스 메이커와 결혼한다면? 상상한 적 있어요.”

요리를 하거나 인테리어 정보를 찾는 김은정의 ‘여성스러운 취미’는 익히 알려진 얘기다. 그 외에도 간간이 머리를 식히는 취미는 도예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도자기를 빚는다. 2~3시간에 걸쳐 하나씩 만드는데 오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컬링에 나름 도움도 된다”고 말했다. 드라이플라워 제작, 음식 플레이팅도 최근 그의 관심사가 됐다. 김은정은 종종 화장에 서툰 김 감독의 메이크업을 해주기도 한다.

수장인 김 감독이 남자 믹스더블 대표팀 감독인 장반석 감독과 ‘컬링 부부’로 지내고 있지만 김은정은 컬링 선수를 미래의 배우자로 생각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아직 선수층이 얇아서 그런지 컬링하는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크게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장 감독 부부는 “경북체육회 컬링 선수끼리 부부의 연을 맺으면 세탁기나 냉장고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김은정은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된다”고 받아쳤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운동해서인지 그냥 오빠, 동생처럼 지낸다. 우리끼리 결혼한다고 컬링이 갑자기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한 가지 상상 속 이야기는 꺼냈다. “동화 같은 얘기인데 잘생긴 아이스메이커가 얼음을 잘 만들어주고 내가 그곳에서 컬링을 하면 어떨까 생각한 적은 있다”고 수줍게 웃더니 이내 “꿈 깨고 그저 운동만 열심히 하겠다”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김은정은 “새해 소망이 올림픽에서 잘하는 것이었다. 올 한 해는 우리 뿐 아니라 모든 컬링인이 행복하게 운동하는 환경이 조성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만호 기념으로 사인을 남길 때도 그는 “앞으로도 컬링 기사 많이 써주세요”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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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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