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김도형기자] 지난달 16일 올림픽 슬라이딩 센터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썰매 금빛 질주가 펼쳐졌다. 주인공은 스켈레톤의 윤성빈(24·강원도청)이었다. 마침 설날이어서 언론에서는 '금빛 세배가 터졌다'고 대서특필했다.


봅슬레이 4인승의 원윤종(33), 전정린(29·이상 강원도청), 서영우(27·경기 BS경기연맹), 김동현(31·강원도청)은 같은 달 25일 올림픽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봅슬레이 오픈 4인승 4차 주행에서 49.65초를 기록하며 종합 2위(합계 3분 16초 38)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썰매 종목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메달을 안긴 스켈레톤, 봅슬레이 대표팀. 이 값진 결과는 개척자로서 모진 풍파를 견뎌낸 강광배(한국체육대학교 교수 겸 썰매부 감독)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광배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하 평창동계올림픽)에서 MBC 해설위원으로 제자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고생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은 아닐까. TV화면속  그의 얼굴에는 23년의 드라마가 담겨있었다.


강광배는 동계올림픽 사상 최초로 모든 썰매 종목(루지, 스켈레톤, 봅슬레이)에 출전한 선수로 기록돼 있다. 특히나 썰매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성과를 냈다는 것 만으로도 동계스포츠 강국들의 이목을 끌었다.


강광배와 썰매의 인연은 아이러니하게도 겨울 스포츠의 대명사인 스키와의 악연에서 비롯됐다. 1994년 스키 지도자로 활동하던 중 무릎 십자 인대를 크게 다쳐 선수로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꿈을 접어야 했다.


재활을 마치고 어떻게 생계를 이어나갈지 고민하던 중 루지 국가대표 선발전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는 '스키 국가대표 감독'을 꿈꾸는 그의 인생에 한줄기 희망의 빛처럼 가슴에 꽂혔다.


1995년 대한체육회에서 실시한 루지 강습회에서 30명 중 2위를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낸 강광배는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며 생애 첫 올림픽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당시 그의 기록은 전체 31위. 썰매 종목의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있는 올림픽이었다.


기분좋게 첫 올림픽을 마무리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올림픽이 끝나고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시련을 맞았다.  앞서 다쳤던 무릎 인대가 또다시 버티지 못하고 고장 나면서 수술대에 오른 것. 국내 루지연맹은 선수 자격을 박탈했다.


수술로 두 번의 좌절. 그러나 강광배와 썰매의 인연은 질기고 단단했다. 당시 지도교수의 소개로 오스트리아 스켈레톤 국가대표인 마리오 구켄베르크와 친분을 쌓은 그는 루지에서 스켈레톤 선수로 전향했다. 모든 변화가 운명처럼 찾아온 셈이다.


1999년 국내에 스켈레톤이 도입되지 않아 오스트리아 국가대표로 활동한 강광배는 2000년 스켈레톤을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들여왔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스켈레톤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해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그 씨앗은 2003년 10월 봅슬레이·스켈레톤 팀 창단으로 이어졌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스켈레톤 국가대표로 다시 한 번 올림픽 무대에 오르며 23위를 기록한 그는 토리노올림픽이 끝나고 스켈레톤에서 봅슬레이로 종목을 전향했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봅슬레이 국가대표로 다시 한 번 슬라이딩 센터에 몸을 맡기며 최종 19위를 기록, 그야말로 "썰매에 미친 자"의 끝을 보여줬다.


실패와 좌절 그러나 다시 일어서는 용기. 이제는 이 모든 게 강광배를 가리키는 키워드가 됐다. 정확히 23년 전 뿌린 씨앗은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금빛, 은빛 질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결실을 맺은 강광배에게 지난 23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오는 15일, 강광배의 썰매 이야기를 전한다.


wayne@sportsseoul.com


사진ㅣ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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