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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파리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남편은 설렘과 기대, 그리고 긴장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던 파리의 첫 숙소를 그대로 예약했다. 여행을 시작한 곳에서 여행이 끝난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 우리는 3개월 동안 60개 도시를 돌았다. 한 도시에서 일주일 이상 머물기도 했고 하루에 서너 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딱히 어디를 가야겠다고 정하지 않았다. 마음이 닿는 곳에서는 오래 머물렀다. 목적지가 목표가 아닌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이 여행이라는 화두에 충실했다.

그렇게 이베리아 반도를 종단해 아프리카 대륙의 탕헤르를 가고, 슬로베니아를 지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까지도 이동했다. 다시 파리에 오니 마치 고향에 도착한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 처음 이곳에서 운전할 때 등 뒤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은 사라졌다. 이제는 도로에서도 파리지엔처럼 여유롭다. 나도 모르게 경험이 쌓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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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족은 세느 강에 노을이 내려앉으면 에펠탑으로 산책을 나갔다. 강변에는 많은 연인들이 병맥주를 하나씩 들고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고, 에펠탑 주변에는 야경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붐빈다. 몸 전체로 노랗게 빛나는 에펠탑은 매시 정각이 되면,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것처럼 눈부신 점등쇼를 보여준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반짝반짝 빛나는 에펠탑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은 곧 허전함으로 밀려왔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3일 동안 헤어짐이 아쉬운 우리 가족은 이곳저곳을 다녔다. 여행 초반, 흥분된 마음으로 봤던 곳을 다시 찾았고, 한적한 교외로 떠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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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빛을 받으며 울려 퍼지는 길거리 음악가의 바이올린 소리가 춤추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한참동안 그 손을 잡고 함께 춤을 췄다. 눈을 감고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의 얼굴에는 빛이 났다.

‘가끔 지치고 힘들 때, 이 선율과 춤을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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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Ⅰ

“엄마, 스카이(리스한 자동차의 애칭)도 데리고 가면 안돼요? 헤어지는거 싫어요”“엄마, 스카이를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내가 나중에 커서 프랑스에 또 오면요” 딸아이는 3개월 동안 우리가족과 함께한 자동차와 헤어지는 걸 많이 아쉬워했다. 나도 그렇다. 스카이라는 이름은 딸아이가 지은 이름이다.

스카이와 유럽에서 처음 마주한 수많은 길을 함께 달렸다. 많이 의지 했다. 3개월 동안 우리 세 식구와 많은 나라와 도시를 함께 누볐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소중한 추억도 함께 나눈 자동차다. 때로는 휴식처가 되었고 때로는 간이식당도 되어 주었다.처음 운전대를 잡고 긴장된 마음으로 파리 시내를 달린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신호를 놓치고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한 일들도 생각난다. 그동안 참 고마웠다. 나는 다음 도시로 출발하기 전에 늘 닦아주었다. 도착하고 나선 수고했다며 핸들을 토닥토닥 만져주었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에는 자동차 사진을 많이 찍었다. 오래 오래 기억하기 위해.

딸아이는 리스한 차를 반납하기 전날 점토로 스카이와 그 안에 타고 있는 우리가족을 만들었다. 코끝이 찡하다. 유럽에서의 마지막 여행길을 파리시내의 오르세 미술관이 아닌 화가 모네가 머물렀던 지베르니를 택한 것도 함께 달리고 싶었고 못 다한 이야기도 해주고 싶어서였다.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으로 가면서 먼저 자동차를 반납했다. 뒷좌석의 딸아이가 울먹인다. 나도 마음이 좋지 않다.

눈물이 나려고 해서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딸아이는 모자를 눌러쓰고 울고 있다. 그 모습에 다시 눈물이 흐른다. 눈물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를 쓴 채, 스카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고 푸조 리스 직원이 공항으로 데려다주는 차량에 올라탔다.“예린아~ 괜찮아. 엄마도 눈물이 많이 나~” 라고 말하며 선글라스를 올려 눈을 보여줬다. 아이가 나의 눈물을 닦아 주고 안아 준다. 우리는 자동차를 향해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스카이, 수고 많이 했다. 그동안 아무 사고 없이 우리가족을 지켜줘서 정말 고마워. 너와 함께 달린 12,600km의 여행길이 행복했단다. 오래오래 기억할께”◇작별Ⅱ

우리 가족은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도착한 샤를 드골 공항에서 한참을 머물러야 했다. 급유차량이 비행기 동체와 충돌하며 새로운 비행기가 준비될 때까지 공항 내에서 여러 시간을 대기했다. 급한 일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조급함이 불끈했지만, 우리는 3개월간 머물렀던 유럽을 정말로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차근차근 마음을 정리하며 유럽과 작별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 끝은 다시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질 것이다. 늘 그랬듯이... 유럽에서의 하루하루가 늘 즐겁지는 않았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아픔은 있었다. 세상살이와 마찬가지로 여행 중에도 거센 비바람은 몰아친다. 그러나 중간에 단 한 번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탄식하지 않았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폭풍우가 지나면 맑은 날이 찾아왔다. 거친 날씨 속에서도 화창한 내일 아침을 엿보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이주화
배우 이주화는 지난 1년간 잠시 무대를 떠나 유럽을 비롯해 세계각지를 여행했다. 추억의 잔고를 가득채워 돌아온 뒤 최근 <인생통장 여행으로 채우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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