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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기업과 선수는 스포츠라는 수레를 끄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다. 현대 스포츠에서 새로운 영웅의 탄생 이면에는 반드시 기업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선수들이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기업의 전폭적인 투자와 후원은 필수적이다. 최근 막을 내린 2018 호주오픈테니스대회에서 4강의 기적을 쓴 정현(22·세계랭킹 29위)의 사례에서도 예외는 없다. 정현은 삼성증권의 후원을 받으며 3년째 투어대회를 뛰고 있다. 삼성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없었더라면 정현의 쾌거는 기대하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삼성이 테니스와 인연을 맺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 1992년 박성희라는 걸출한 여고생 한명을 글로벌 스타로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게 바로 삼성물산 테니스팀이다. 우물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던 한국 테니스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지도자가 바로 당시 주원홍 감독이었고, 그는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삼성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 문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여기서 꽁꽁 감춰졌던 비사(秘史) 하나. 그렇다면 삼성물산 테니스팀은 어떻게 창단됐을까? 당시 테니스 마니아인 중진 야당 국회의원이 삼성에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을 가해 창단됐다. 기껏 아시안게임에 안주하던 한국 테니스는 이후 투어대회를 겨냥한 삼성물산의 팀 창단으로 새로운 눈을 떴다. 박성희를 시작으로 삼성물산에 둥지를 튼 윤용일 이형택 그리고 조윤정 등은 세계로 눈을 돌려 도전자의 자세로 프로 투어를 뛰며 신천지를 개척했다. 이형택은 한국 테니스 사상 최초로 ATP(남자프로테니스)투어 대회 우승을 거머진 것은 물론 두 차례의 US오픈 16강을 이뤄내며 마침내 황무지에서 첫 꽃을 피웠다.

정현의 호주오픈 4강의 기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결코 아니다. 그가 쓴 역사는 20여년에 걸친 삼성의 꾸준한 지원과 황무지에서 땅을 일군 프런티어 선배들의 땀과 노력에 힙입은 바 크다. 이형택은 주니어대표팀 감독 시절 정현의 기본기를 잡아줬고 윤용일은 정현의 전담코치를 맡으며 투어대회 경험과 기술을 전수했다. 영국에서 스포츠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성희 역시 정현의 ‘마음 밭’을 일궈주는 멘털 코치로서 큰 역할을 해냈다. 시간은 다르지만 삼성 테니스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선배들이 후배 정현이 큰 역사를 쓰는데 제각기 도움을 줬다고 보면 이번 쾌거는 더욱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삼성이 한국 테니스에 공헌한 건 돈이 전부가 아니다. 한국인은 테니스에서 결코 세계의 중심부에 진입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깬 게 삼성이 테니스에 공헌한 가장 큰 업적이다. 한국 테니스의 도전정신과 삼성의 기업가정신은 일맥상통했고, 그게 정현이라는 선수를 통해 큰 열매를 맺었다. 공들여 쌓은 탑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정현의 호주오픈 4강에는 1992년 이후 묵묵한 후원자로 최선을 다한 삼성의 공을 빼놓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최근 삼성의 스포츠에 대한 열정과 태도는 과거와 사뭇 다르다. ‘최순실 사태’의 후폭풍 탓인지 스포츠에 대한 삼성의 투자와 지원은 눈에 띄게 후퇴했고 앞으로 삼성이 모든 스포츠에서 발을 뺄 것이라는 성급한 추측마저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추측속에 오는 3월로 정현과의 3년 후원계약을 마치는 삼성증권은 계약연장을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보다 가슴 아픈 건 없다. 더욱이 한 사람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공들여 쌓은 탑이 한 순간 무너진다면 그건 비극이다. 역사와 전통은 결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삼성이 스포츠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한국 스포츠의 든든한 후원자로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게 체육계의 공통된 바람이다.

부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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